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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n 10. 2022

일상 1

#월남쌈 잘 싸는 법 #낮술의 즐거움 #내려놓기 #짝꿍 말을 잘 듣자

"자기야!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 월남쌈이야 아니면 삼겹살?" 


이 무슨 선택 장애를 유발하는 날벼락같은 상황인가? 하하하. 짜장면도 땡기고 짬뽕도 땡기는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짬짜면을 시키든지 아님 짜장면을 시킨 후 짬뽕을 먹는 사람과 적당량을 교환하는 방법이 있다. 


둘 다 좋아하는 메뉴라 선뜻 한 가지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둘 다 먹으면 안 될까"라고 소심하게 말했더니 예상대로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할 수 없지 뭐. 월남쌈" 


날씨가 더워 고기를 굽고, 뒤집고, 자르기도 귀찮았고, 집안 가득 퍼질 연기와 냄새도 감당 안될 듯싶었다. "알아써"라고 대답하는 짝꿍의 목소리에 경쾌함이 묻어났다. 잠시 후 주방에서 통통통 채소를 썰고, 지글지글 프라이팬에 재료 볶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사실 26년의 주부 내공을 가진 아내는 요리 속도가 빛처럼 빠르다. 어떤 요리든 십분 정도 뚝딱거리면 완성이 되어 나온다. 물론 맛은 보장 안된다는 게 함정! 


미각 실종증(?)을 아주 쪼금 앓고 있는 짝꿍은 찌개나 국을 끓일 때면 항상 마지막 간 맞추는 일은 나 또는 딸내미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매번 같은 재료와 레시피를 쓰는데도 맛은 늘 다이내믹한 건 짝꿍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도 남편 챙겨주는 마음만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


퇴직 후 젖은 낙엽 신세가 되어 삼식이를 자처하는 남편을 위해 매일 삼시세끼 메뉴를 골라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주는 일은 그간 혼자 살면서 대충 끼니를 때워왔던 짝꿍 입장에서 볼 때 아마 적지 않은 스트레스일 텐데 짝꿍은 싫은 내색 한번 안 하고 매 끼니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준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점심, 저녁 메뉴로 뭘 먹고 싶은지 묻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런 짝꿍이 늘 고마울 뿐이다. 


"다 됐어. 빨리 나와" 


속도의 여제답게 빛의 속도로 요리가 완성되어 차려졌다. 행여 짝꿍 심기를 건드릴까 다급한 척 서재에서 거실 식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색색의 파프리카, 오이, 양파, 깻잎, 닭가슴살, 새우, 복숭아까지 알록달록 예쁜 식감이 돋보이는 싱싱하고 맛깔난 월남쌈 재료들이 화려하게 식탁을 수놓고 있었다. 이런 날 빠질 수 없는 그 뭔가가 떠올랐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월남쌈


"자갸~ 오랜만에 신선들이나 한다는 낮술 한잔 때릴까"

"당근 빳데루지"


오랜만이란 말은 매일 먹지 않는다는 뜻이니 오해하지 마시라. 첫 잔은 김냉에 히야시(冷や) 시켜놓은 아니 차게 보관한 수제 맥주였다. 반씩 잔에 따른 후 평소처럼 "짜잔" 건배를 하면서 원샷을 때렸다. 꿀꺽꿀꺽 넘어가는 목 넘김, 시트러스 과일향과 무거운 바디감, 부드러운 거품과 쌉싸름한 끝 맛, 가슴과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맛! 그래 이 맛이지. 

사진출처 : GIB 제공


역시 맥주는 냉맥(냉장고 맥주)이 아니라 김맥(김치냉장고 맥주)이 정답이다. 김냉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왜 업체들은 이런 중요한 콘텐츠를 광고에 넣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안주를 먹어야지. 먼저 라이스페이퍼를 적당히 따뜻한 물에 적셔 접시 위에 편 후 그 위에 각종 재료를 푸짐하게 올렸다.


아내가 시킨 대로 말다 보니 모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옆구리가 터지고 재료가 쏟아졌다. 얼떨결에 소스를 찍을 겨를도 없이 입에 쑤셔 넣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본 짝꿍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어이구! 자기야 욕심을 버려야지. 내가 가르쳐줄 테니 자세히 봐. 이렇게 라이스페이퍼 중간에 재료를 적당히 예쁘게 올린 후 일차적으로 말면서 양쪽을 당겨 안쪽으로 넣은 후 계속 말면 예쁘게 모양이 나오는 거야." 


그랬다. 난 욕심이 많았어 실패했던 것이다. 식탐은 화근이었다. 갑자기 짝꿍의 말이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잠시 과거의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난 늘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잔업과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상사와의 술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인정과 승진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직장이라는 세렝게티 속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이런 욕심은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형과 누나들 틈에 끼여 배를 주리지 않기 위해서 난 양손으로 먹고, 씹지 않고 삼키는 절대 신공(?)도 어렵지 않게 터특했다. 일단 배만 부르면 만사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욕심과 식탐은 결핍을 채우는 도구로 장착되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심은 내 삶의 가장 큰 성장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살면서 일이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난 저항하기도 했고, 분노하고, 체념하면서 분노와 스트레스의 감정을 겪기도 했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삶의 호불호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삶의 주도권과 통제권을 거머쥐고 싶은 욕심도 커졌다. 그럴수록 삶의 불확실성과 가변성 또한 함께 커져갔다. 지나 보면 다 부질없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변광대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먼지 한끝에도 못 미치는 내 삶을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우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한 가지도 없는데도 난 늘 삶의 주도권을 잡고 통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常, 우주만물은 생멸하고 변한다)의 심오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짝꿍이 볼 때 난 여전히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고, 퇴직 후 일상생활에서 내 모습은 첫걸음마를 막 시작한 사회초년생처럼 모든 게 서툴고 어설픈 것 투성이었을 것이다. 짝꿍이 시킨 대로 욕심을 버리고 월남쌈을 싸 보니 나름 예쁘게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짝꿍 말을 들어 손해 볼 게 없다.


'소식좌(소식의 본좌)'인 짝꿍은 월남쌈 서너 개를 먹자 다 먹었다며 나를 위해 월남쌈을 예쁘게 싸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접시에 푸짐하게 월남쌈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평소 근력 운동으로 대식좌로 불리는 내게 가득 쌓인 월남쌈은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수제 맥주로 시작한 신선놀음은 와인으로 바통을 넘겼다. 월남쌈과 와인도 궁합 또한 일품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보다 행복한 사람 있음 나와보라 그래!!! 이 얼마나 꿈꾸던 퇴직 후 삶이란 말인가. 


달콤한 인생도 끝이 있게 마련. 광란의 낮술 파티가 끝나자 다시 헛헛한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짝꿍의 한 마디가 내게 소소한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다. 무변 광대한 삶의 후반부 여정에서 전반부처럼 너무 고군분투하며 애쓰고 살지 말라고 말이다. 


최근 텃밭을 가꾸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다. 묘목과 모종을 심은 후 물을 주고 나면 그다음은 시간의 몫이란 걸 말이다. 가끔씩 텃밭을 방문하면 기대 이상으로 훌쩍 자라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켜보면서 난 많은 걸 깨닫는다.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세월에 흐름에 맡기는 게 삶을 살아가는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젠 욕심도, 욕망도, 불안도, 초조함도, 두려움도, 스트레스도 잠시 내려놓고 매 순간 열과 성의를 다한 후 나머진 시간의 흐름에 맡기며 살아야겠다. 삶은 그냥 놔둬도 잘 자라는 식물처럼 꽤 훌륭하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걸 나이가 든 지금에야 미약하게 깨닫는다. 


월남쌈과 낮술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바로 욕심을 내려놓음, 그리고 삶의 흐름대로 내맡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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