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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Sep 09. 2022

삶의 에피퍼니(epiphany)를 느끼는 순간

#에피퍼니 #epiphany #무라카미하루키 #직업으로서의소설가 #정체성

최근 들어 글쓰기에 대해 열패감과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잦아졌다. 도대체 내가 왜 글을 쓰려는 걸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생을 마감하기 전 책 한 권이라도 출간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와 몽상으로 글쓰기에 도전해 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필력은커녕 기존에 남아있던 호기(氣)마저 사그라들면서 글쓰기를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브런치 작가 소개란에 내가 작성했던  'I am what I write(내가 쓰는 글이 내가 된다)'라는 문장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아마 나는 내면적으로 글쓰기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숨겨진 자아를 찾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성찰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교훈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면적인 욕구가 커질수록 글감과 소재는 빠르게 고갈되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노력하며 썼던 결과물은 마치 어둑 컴컴한 막다른 골목길 위에 게워놓은 지저분한 토사물처럼 흉물스러웠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막 써 내려간 듯한, 주제도 맥락도 없는 초기 작품들은 더욱 강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냥 놔두자니 부끄럽고, 다시 퇴고하자니 시간적으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나 말고는 읽을 사람이 없기에 그냥 퇴고하지 않고 부끄러운 나의 글쓰기 역사(?)로 남겨 두기로 했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는 어렵고, 난해하고, 수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글을 좀 쓴다는 것인 줄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글을 쓸수록 좋은 글은 쉬운 용어로 쓰여져 읽기 쉬운 글이어야 하며, 자신만의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가 있어야 하며, 스토리의 차서(次序)와 차이(差異), 타인과의 공감(共感)과 연결(連結)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좋은 글은 맥락과 행간의 의미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며, 리듬감있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좋을 글을 쓰고 싶은 간절한 바람으로 문필력이 뛰어난 작가의 글들을 읽어도 봤지만 막상 책을 덮고 나면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리셋되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게 되면서 나의 글쓰기 역량의 임계치를 자주 맛봐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글쓰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사유와 관찰의 힘이 커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사물의 현상이나 상황, 타인의 말이나 글에도 그냥 흘러 지나치지 않게 되었고, 잠시나마 그 이면에 담겨있는 의도와 의미를 사유하고, 또 그것을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브런치에 자주 올라오는 인기 작가님들의 에너지 넘치는 글들을 보면서 특히 많은 깨달음과 자극을 받곤 한다.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개성과 에너지가 넘치는 글들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나만의 결을 가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최근 읽은 책이 한권 있다. 21세기가 낳은 최고의 작가라고 불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이다. 작품을 발표하는 일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해온 그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대한 은밀한 얘기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가 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일본의 문학계와 문학상의 실체는 어떠한지, 자신만을 글을 쓰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하며 또 무엇을 써야 할 것인지, 누구를 위해서 쓸 것인지, 어떤 연유로 일본을 떠나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강력한 사고의 궤적들이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글쓰기에 필요한 내용 위주로만 발췌해 본문의 내용을 인용해 보았다. 어쩌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은 배제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글쓰기의 장벽에 가로막혀 길을 잃은 분들이 행여 있다면 잠시 시간을 내서 읽어보시길 바란다. 적잖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顯現)'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문득 아무 맥락없이, 아무 근거도 없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epiphany의 순간을 경험했다. 하늘에서 뭔가가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기분이었고, 그것은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고. 애초에 소설이라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가늠조차 못했던 그가 '아마 대충 이럴 것이라'라는 어림짐작으로 몇 달 동안 써본 것이 바로 그의 첫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였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라, 라는 기성관념은 버리고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런데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쓴다'는 게 말로 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발상을 전환하기 위해 했던 것이 바로 영자 타자기를 꺼내 소설의 첫 부분을 시험 삼아 영어로 써보기로 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복잡한 생각이 잔뜩 들어 있어도 그걸 영어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내용을 가능한 한 심플한 단어로 바꾸고, 의도를 알기 쉽게 패러프레이즈(parapharase, 치환)하고, 묘사에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전체를 콤팩트한 형태로 만들어 한정된 용기에 넣는 단계를 거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름의 문장 리듬 같은 것이 생겼다.


이때 그가 발견한 것이 설령 언어나 표현의 수가 한정적이어도 그걸 효과적으로 조합해내면 그 콤비네이션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감정 표현, 의사 표현은 제법 멋지게 나온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국어로 글을 쓰는 효과의 재미를 '발견'하자 그는 영자 타자기를 붙박이장에 넣어버리고 다시 원고지와 만년필을 꺼내 그가 작성한 영문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직역이 아닌 자유로운 이식(移植)을 하자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체가 나타났고,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렸다. 이따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번역 투라는 말이 들리긴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뉴트럴(neutral)'한, 활동성이 뛰어난 문체를 획득하는 것이었고, '일본어다움을 희석시킨 일본어 문장 쓰기가 아니라 이른바 '소설 언어', '순수문학 체제' 같은 것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일본어를 채용해 자신만의 자연스러운 음색으로 소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설을 쓸 때 그는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체감의 느낌으로 쓴다고. 그래서 그의 첫 소설은 그해 <군조> 신인상 최종심에 올랐고, 급기야 신인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고 글쓰기에 있어서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가 중요하다. 뇌신경학자 의사 올리버 섹스는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저서에서 '창조성에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강고한 아이덴티티와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어서 그것이 재능에 반영되고 녹아들어 개인적인 몸과 형태가 된다'라고 오리지널한 창조성을 정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이란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기존의 견해를 타파하고 상상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갯짓하면서 마음속으로 완전한 세계를 수없이 다시 만들고, 나아가 그것을 항상 비관적인 시선으로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 무엇을 마이너스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정보 과다'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머릿속에서 '없어도 되는' 콘텐츠를 모조리 치워버리고 사안을 '뺄셈'적으로 단순화하고 간략화하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만큼, 말로 하는 만큼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에 처음부터 그다지 깊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무욕(無欲)이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자유롭고 내추럴한 감각이야 말로 자신이 쓰는 소설의 밑바탕에 자리한 것이다. 한마디로 '어깨에 힘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추구하는 않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로워지며,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하다 보니 한 번도 소설이 써지지 않는 슬럼프 기간인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쓰고 싶을 때만 '자, 써보자'라고 마음먹고 소설을 쓴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 번역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에세이 등을 쓰기도 한다고. 한참 소설을 안 쓰다 보면 '이제 쓸쓸 써도 될 것 같은데'라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면 쓰기 시작하면 된다고. 그리고 그는 비틀스 데뷔 당시 《뉴욕타임스》에 쓰인 논평을 빌려 오리지낼러티는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달걀을 깨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얘기라고 말하면서 최대한 젊은 시절에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어서 기초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다음 할 일은 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붙여야 한다고. 또한 주변 인물들이나 어떤 일에 콤팩트하게 분석해서 단시간에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으며,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며, 있는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야 한다.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시점에서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는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바이클이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오히려 편해진다. 왜냐하면 '써야 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측에서 스토리를 짜낼 수 있는 작가라면 편할지도 모른다.


자기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나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재로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상상력을 구사하여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스토리를 꾸며나가면 된다. 이건 말하자면 '자연 재생 에너지'같은 것이다. 약간의 시점을 바꾸면, 발상을 전환하면,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 태도'이다. 그것이 바로 키포인트다.




무라카미는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라는 말을 빌려 그 또한 잘 될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20매를 쓰려고 노력했다.  초고가 완성되면 잠시 일주일쯤 쉬고 첫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간다. 여기서는 상당히 크게, 전체적으로 손을 보느데 대략 한두 달이 걸린다. 그리고 일주일쯤 쉬었다 두 번째 고쳐 쓰기에 들어간다. 이 때는 좀 더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꼼꼼하게 고쳐나간다. 수술이라기보다는 수정에 가까운 작업이다.


그리고 보름에서 한 달쯤 긴 휴식을 취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건축 현장에 '양생(養生)이라는 단계가 있는데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의미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만다. 그렇게 작품을 진득하게 재운 다음 다시 세세한 부분의 철저한 고쳐 쓰기에 들어가게 되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도 아주 또렷하게 보이고,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도 된다.


양생을 거친 후 다음 단계는 제삼자의 의견이다. 아내에게 읽어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 과정에서 한 식구임에도 적잖게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지적 받은 부분을 수정하는데 대부분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읽고 수정하고 과정을 몇 번이고 거친다. 퇴고 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한다.


담당 편집자와 퇴고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호감이 가든 가지 않든 편집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수정을 거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 그 차제다. 작가가 '이곳을 좀 더 잘 고쳐보자'라고 결심하고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손질한다, 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을 다 쓰고 난 작가는 대부분 흥분 상태로 뇌가 달아올라 반쯤 제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장편소설을 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 정신이 아닌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인간에게 제정신인 인간의 의견을 대체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 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 잘 모른다. 원고 단계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한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로 정도의 HB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낀다.


시간을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소중한 요소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양생되고, 완성되기 때문이다. 온천물과 가정용 목욕물의 차이와 비슷하다. 온천에서는 설령 물의 온도가 낮더라도 뼛속까지 지이잉 따끈함이 스미고 욕실을 나온 뒤에도 그 온기가 쉽게 식지 않는 반면 집 안 욕실의 물이은 뼛속까지 스며들지 않아서 나오자마자 몸이 식어 버린다.


그래서 내 작품은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쿨하게 넘어간다. 왜냐하면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이다. 사전 작업에도 양생에도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고, 망치질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는.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자신감을 잃는 따위는 일단 없다. 현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그 작품들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였고, 레이먼드 카버가 말한 것처럼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을 써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시간의 손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어떤 사람이 이 소설을 읽을 것인지, 그 사람들이 내가 써낸 것에 과연 공감해줄지, 여기에 어떤 문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아무튼 그런 복잡한 건 도저히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또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 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여러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한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한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는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니까 간단하겠지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가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된다.


리키 넬슨이 만년에 발표한 노래 <가든파티>에는 이런 노랫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다면 나 혼자 즐기는 수밖에 없지." 모두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 봐도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나 자신이 별 의미도 없이 소모될 뿐이다. 그러느니 모른 척하고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만일 평판이 좋지 않더라도, 책이 별로 팔리지 않더라도 '뭐, 어때, 최소한 나 자신이 즐거웠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고전 문학 평론가인 고민숙 작가는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다.  질문을 잘하는 법은 그 주제에 대해 사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하니깐 질문을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한자의 사량(量, 생각하여 헤아림)에서 파생된 말로 생각하는 양만큼 커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생각을 쌓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라고 강연에서 말했다. 좋은 하루가 쌓여 좋은 인생이 만들어지듯 하루하루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보다 의미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좋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님들 힘들고 고된 시기지만 모두들 한가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늘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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