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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Feb 25. 2021

화향 백리, 주향 천리, 인향 만리

꽃 향기는 백리를, 술 향기는 천리를,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

현장 근무를 할 때면 힘은 들어도 언제나 현장의 직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그들과의 짧은 눈인사와 스몰토크가 나름 활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퇴근 후에 관리자들과 한잔씩 하는 술자리는 언제나 즐거웠다. 계급장을 떼고 대화를 하곤 했다. 


직장생활과 은퇴 후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걱정과 의견들을 서로 나누면서 오랜만에 삶의 실질적인 관심사들로 화제가 채워졌다. 이런 술자리는 빨리 끝내고 싶어도 아쉬워서 세컨드 라운드로 이어지곤 한다.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해서 헤어질  때 아쉬움도 크다. 사실 술자리의 특성상 어느 정도 술을 먹어야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배가 너무 부르지 않는 안주 맛집을 선정해야 한다.




건배사를 하지 않는 것이 지금 세대의 룰이라면 우리 세대는 건배사의 세대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방 방송으로 술자리가 어수선해지고, 집중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술 안 마시는 사람들은 거의 마시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하지만 돌아가며 건배사를 하다 보면 저마다 삶의 여정 속에서 맘속에 담고 있는 혜안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가끔씩은 뛰어난 건배사로 술맛도 배가되곤 한다. 


이렇게 건배사가 돌고 술잔을 비우다 보면 어느새 술못먹던 친구들도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라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술기가 돌기 시작한다. 건배사가 다 돌고 나면 어느새 술자리는 시끄러우지고 그간 대화가 없는 사람들끼리 술자리에서의 친분들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술이 좋아서 취하는 게 아니다. 분위기에 취해 술을 더 마시는 것이다.



가장이라는 무게의 짐을 함께 지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모이는 자리는 정말 소중하기도 하지만 즐거운 자리이기도 하다. 술을 마실 때에는 가급적 직장생활 얘기를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술자리는 직장생활의 연장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부하직원들 간에 많은 소통의 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오기 전 아싸(아웃사이더) 친구들도 이런 자리 몇 번만 하다 보면 인싸(인사이더)로 바뀌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관계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술을 못 마시는 친구들에게 술자리는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을 안 마시면 절대 맛볼 수 없는 안주 맛집에서 맛있게 먹고, 그간 껄끄러웠던 동료들과 소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이런 술자리도 중독이 되고, '술꾼 도시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항상 술자리 예약에 있어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맛집 선정이다. 원래 주당들의 경우 안주가 먹고 싶어 술을 먹는 경우도 많다.




나 같은 경우 이런 술자리를 만들어 많은 성실한 부하직원들을 주당으로 만들곤 했다. 억지로 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결국은 자발적 주당이 된 것이다. 딱딱하고 엄격한 직장생활에서 우리는 제대로 소통 분위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시곗바늘처럼 돌아가는 업무의 루틴과 밤낮으로 돌아가는 업무 스케줄로 인해 솔직히 직원들 간 친분을 쌓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다. 


부서별로 일을 하는 업무여건 때문에 부서별 소통 장벽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부임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동호회를 만드는 것이다. 정규직들만을 위한 스포츠 동호회를 만들었다. 제일 좋은 스포츠 종목은 풋살이다. 업무 후 간단하게 풋살을 하고 난 후 참여하는 술자리는 그야말로 꿀맛이다.


거기다 첫 순배는 원샷이라는 유래가 없는 원칙을 적용했다. 물론 못 마시는 친구들은 예외다. 술을 못 먹는 친구들은 평소 자주 보지 주당들의 술 취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에 한편으로 재미도 느낀다. 이렇게 술을 먹든 못 먹든지 모든 친구들이 건배사가 한 번씩 돌아가고 나면 어느새 분위기는 화기애애 해진다.


잦은 이런 자리로 인해 서로 간의 친분이 쌓이고, 그들만의 별도 모임과 자리가 만들어지면서 나는 어떨 때 아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자리가 바로 이런 자리다. 모든 직원들이 서로 친해지고 그런 친분으로 서로 간의 업무소통과 업무협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조직 분위기는 최고의 컨디션이 되는 것이다. 원래 일은 현장의 직원들이 모두 한다. 그들이 현장에서 고객들과 소통하고 응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부서 간 장벽을 없애고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펜데믹이 1년간 휩쓴 요즘에는 이제 이런 자리가 거의 사라지고 없어졌다. 특히 5인 이상 모임 금지가 지속되면서 단체회식은 이제 금기사항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는 업무외적으로 이루어진다. 직장 내에서의 관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직장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예전보다 술자리가 줄면서 직장의 즐거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적응을 해야 하지만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보면 아마 꼰대 문화라고 비꼴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을 경험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 시절에만 통용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친근한 꼰대 문화였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직장생활에서 느낀 술자리는 즐겁다기보다는 업무의 연장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상사의 무용담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술을 강제로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늦은 밤까지 술자리는 그다음 날 이른 출근으로 반드시 이어져야 했다. 술자리도 업무의 연장이기 때문에 다음날 출근 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거의 사형선고에 가까웠다. 


일을 못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술을 먹고 정신을 못 차리거나 지각하는 것은 절대 용서가 안 되는 그런 시대였다. 술을 잘하는 것도 승진과 관계 개선 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술자리가 계속되면서 술배도 나오고 건강도 나빠졌다. 직장에서 하는 술자리가 워낙 많다 보니 집에서 술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나의 직장생활을 보면서 아내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계속 커가는데 아빠는 술에 취해 매일 늦고, 휴일에는 잠만 자니 가족생활도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라밸(Work life balance)은 사전에만 나오는 단어였다. 삶의 균형은 직장생활이 우선해야 가능한 분위기였다. 한 때는 승진면접 시 면접관이 워라벨에 대해서 물었는데 그 당시 면접관이 원하는 정답은 워라벨은 업무 현실상 어렵고, 당연히 업무가 우선된 이후에야 가정생활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워라벨을 이야기하다 솔직히 승진에 누락된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 세대가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삶의 전환점이 왔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한 자리에 오르면서 나도 술자리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술을 거의 먹지 않던 나는 집에서 술을 먹기로 결정했다. 두 자녀를 키우던 아내가 우울증이 오면서 내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행복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하던 내게 있어 아내와의 술자리 만들기는 '소중한 것 먼저 하기'였다. 불가피하게 술자리를 할 때면 딱 1차만 하고 2차는 집으로 향했다. 


마침 집 앞에 아내가 좋아하던 포장마차 타입의 횟집 차가 있어 가성비 좋은 회를 자주 사다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아내와의 술자리를 통해 대화시간도 많아지게  되었다. 물론 아내는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술안주가 좋다 보니 맥주 한잔씩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술자리를 통해 대화시간도 늘어났다. 나도 자연스럽게 집에서 먹는 홈술에 익숙해져 갔다.




펜데믹이 확산된 요즘은 홈술이 대세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홈술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술은 당연히 술집에서 마셔야 한다는 생각들이 팽배했다. 이제는 집에서 술을 자주 먹는다. 아내가 만들어 준 맛있는 밥반찬으로 먹는 반주와 아내가 함께 마시는 술 분위기는 최고다. 가끔씩 먹는 배달음식은 아내도 정말 좋아한다. 


술은 신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 과하지만 않으면 좋은 취기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술을 마셔야지 술이 우리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 술을 못 먹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마저 든다. 술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술을 적당하게 알면서 먹으면 그 즐거움도 더욱 배가된다. 그럼 술 예찬론을 잠시 펼쳐보자.
 



신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세 가지는 바로 술, 커피, 초콜릿이라고 한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중국 당나라 시선 이백의 시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라는 <월하 독작(月下獨酌)>의 한 구절이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화류(花柳)"라는 시에서 "하늘이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게 하려면 꽃과 버들이 피지 말도록 하여라" 라며 신이 주신 선물인 술을 예찬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술은 소울푸드이다. 문화적인 미각으로 마시고 감성으로 취하는 것이다. 술을 고를 때 중요한 건 절대적인 맛이 아니라 거기에 얽힌 추억과 향수다. 한 여름 뜨거운 불판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 한잔, 비 오는 날 막걸리에 파전은 바로 술이 가지는 소울푸드의 이미지다.




호르메시스(Hormesis)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미량의 적절한 스트레스나 독소에 노출되면 오히려 생체에 유익한 효과로 작용한다는 현상으로 '호르몬과 같은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런 현상은 '해로운 물질로부터 얻는 혜택'의 관점이 아니라 '해로움 혹은 약효는 복용량에 달려 있다'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렇듯 술은 적당하게만 마시면 몸에 약이 된다. 마지막으로 술을 먹고 우리는 연인을 만들기도 하고 연인과 헤어지기도 한다. 가끔은 술자리를 통해 끈끈해진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신뢰하는 부하직원들을 보면서 도움이 되는 명언이 있다. '누군가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완전히 믿으면 그 결말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일생의 최고의 인연을 만나거나 일생의 최대의 교훈을 얻거나'이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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