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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y 16. 2021

와인 쏟고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날

#석가탄신일 #치와(치킨 와인) #혼술 #혼밥 #한강 걷기 #비 오는 날

다음 주 석가탄신일에 올라오겠다는 아내의 전화에 금주는 대구 자택에 내려가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서울 본사 근무를 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처음으로 서울 사택에서 혼자 주말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과 무엇을 먹고 주말을 보낼 건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동시에 교차했다. 주말 동안 비가 온다고 예보되어 있어 딱히 나갈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늘어지게 방굴라데쉬(?)를 할 생각이었다.


비연고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먹거리 해결이다. 그래서 나는 금요일 퇴근 후 사택으로 걸어가면서도 '오늘은 뭘 먹지? 오랜만에 좋아하는 치킨을 시켜먹을까'라는 기대감으로 평소 저장했던 치킨집에 전화를 눌렀다. 역시 불금이라 최소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짤막한 답변을 들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심 속으로는 한 시간 이상도 기다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혼자서 온전히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




평소 퇴근과는 달리 주방에서 저녁 먹거리를 준비하지 않고,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방에서 조용히 TV 속 영화 한 프로를 시청하면서 치킨을 기다렸다.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치킨이 도착했다. 나는 보통 배달하시는 분을 배려해서 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치킨을 받고 결제를 한다. 오늘도 역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배달하시는 분이 반가운 얼굴로 치킨을 건네주고 카드를 결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결제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는지 잠시 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나는 치킨을 건네받고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바로 치킨 시식을 할까 생각하다가 다시 벨을 누르면 옷을 입고 다시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사실 나는 집에서 속옷만 입고 지낸다) 때문에 나는 잠시 치킨 먹는 것을 보류하고, 잠시 침대에 누워 TV를 시청했다. 이것도 후에 일어날 사태의 암시였을까?



삼십 분이 넘었는데도 아무 연락도 없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치킨 박스를 언박싱하려고 할 때 현관 벨이 울렸다. 다시 나는 반바지와 윗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카드 결제를 끝내고 나니 그간 맘속에 남아있던 모든 불안감과 근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평소 같으면 거실의 식탁에서 치킨과 함께 와인 또는 맥주를 한잔 하는데 오늘따라 왠지 TV에서 하는 영화가 재미가 있어서 그랬는지 침대 위에서 먹겠다는 기막힌 발상(?)을 갑자기 하게 되었다. 나는 빠르게 좌탁을 꺼내서 침대 위에 펼치고 치킨과 소금, 와인과 와인잔, 치킨무를 세팅했다. 혹시 먹다가 쏟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무릎담요를 침대 위에 깔고 좌탁을 설치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침대에 올라갈 때마다 침대가 조금씩 흔들리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모든 세팅이 끝났다.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채우고, 치킨을 한 입 뜯으니 갑자기 치킨을 기다리던 번거로운 시간들이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와인의 향이 입안을 감미롭게 감쌌고 나는 혀를 굴려서 그 맛을 깊게 음미했다.  닭날개와 와인은 궁합이 찰떡이었다. 그렇게 닭날개가 하나씩 없어지면서 내 얼굴도 와인 색깔로 물들었다.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 상을 잠시 물리고 휴대폰을 받으면 되는데 왜 그랬을까? 휴대폰을 줍는다고 몸을 기울였는데 이게 웬일인가? 상위에 가득 채운 와인잔이 기울어졌고,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잡으려고 하다고 상이 앞으로 엎질러졌다.



침대는 온통 와인으로 물들었고, 치킨은 흩어져 널브러져 있고, 소금과 치킨무 국물까지 쏟으면서 나는 완전 멘붕에 빠졌다. 하필 침대 매트리스 커버는 왜 흰색이었을까?  얼른 침대 위의 치킨과 무를 다시 박스와 용기에 담고 일단 상을 거실로 치웠다. 그리고 젖지 않은 베개와 이불은 거실 소파 위로 옮기고, 매트와 매트리스 커버를 벗겨서 거실로 나왔다. 매트리스까지 와인색으로 얼룩이 번졌다. 오십 넘어 직장생활도 이렇게 힘들고 정신없는 적은 없었는데........ 문제는 매트리스 커버가 두 개라는 것이었다. 원래 커버 위에 부드러운 소재의 커버를 한 개 더 씌운 것이 이번에는 더 큰 화근이었다. 나는 매트 한 장과 커버 두 장을 들고 정신없이 싱크대로 가서 주방세제를 묻혀 손으로 비볐다.


예전에 아내가 천이 음식물로 오염되었을 때 빨리 주방세제를 묻혀 씻으면 깨끗해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십 분을 주방세제를 묻혀서 손으로 힘껏 비볐다. 어느새 반쯤 있는 주방세제도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대충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매트를 보니 다시 멘붕이 왔다. 나는 일회용 티슈에 주방세제를 묻혀 매트리스를 문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점입가경으로 매트는 주방세제로 닦을수록 와인색 얼룩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다시 차려서 다시 매트, 매트리스 커버 두장을 함께 세탁기에 넣을 수가 없어서 한 장씩 돌리기 시작했다. 한 장을 세탁하는데 거의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나는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잠은 자야 되니까 일단 매트리스를 드라이기로 말리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인가? 십 분 정도 작동을 시키니깐 드라이기도 맛이 갔는지 멈추었다. 세 번째 멘붕이 왔다. 나는 다시 거실로 나가서 정신을 완전히 풀어헤치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좁은 공간에서 조금 전 먹다 남은 닭날개를 뜯기 시작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트리스 커버 한 장 세탁이 끝나고, 다시 매트리스 한 장, 그리고 매트.... 이렇게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12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단 이동 건조대 한 개를 이용해서 매트리스 커버 한 장을 말리고, 또 식탁 의자 네 장을 이용해 매트리스 커버 한 장을, 그리고 소파를 이용해 매트를 말렸다. 거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세탁물로 뒤덮였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단 침실로 돌아와 어느 정도 마른 매트리스 커버 위에 여분의 이불을 깔고, 베개를 세팅했다. 배가 고팠지만 도저히 치킨과 와인을 먹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누워서 TV를 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어제의 참혹한 현장이 그대로 거실에 재현되어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옷장 방으로 이동해서 홈트(?)를 했다. 땀이 비가 오듯이 왔고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도저히 집에 있을 기분이 아니어서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주말 동안 비가 온다고 했는데.... 습도는 높았지만 오전 날씨를 보니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먼지가 가득 쌓인 차를 몰고 일단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정말 기분도 꿀꿀하고 오늘은 왠지 빗속을 걷고 싶었다. 오랜만에 우산 속에 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었고, 미세먼지로 가득 덮인 세상을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것을 보고 싶었다. 최근 일 년간 혼자 제대로 빗속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끔 회사와 사택 간에 삼분 거리를 이동할 때 비를 맞는 그 정도가 다였으니깐 말이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비가 온다는 소식에도 많은 사람들이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망중한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케아에서 구매한 작은 배낭가방에 물을 넣고, 한공 공원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나 혼자만의 산책길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이전의 아내와 이 길을 걸을 때는 손도 잡고,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걸었었는데.....



주변도 살피고, 잠시 그물 의자에 누워 쉬기도 하고, 산책로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계속해서 걸었다. 이십 분 정도 걷다 보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내리는 비를 맞고 걸었다.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준비했던 장우산을 펼쳤다. 끝까지 걸어볼 생각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수풀이 가득한 소로가 눈앞에 보였다. 겨우 한 사람 걸을 정도로 좁은 소로였고, 길 좌우에는 무성한 풀들이 마치 정글처럼 우거져 있었다. 비가 오다 보니 비에 젖은 풀들이 그 사이를 가는 나를 완전히 젖게 했다. 그렇게 끝까지 걸어갔다. 마지막에는 도로와 이어졌고, 나는 다시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


오랜만에 혼자 오랫동안 빗속을 걸었던 것 같다. 빗소리도 정말 좋았지만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굵은 빗방울에 깨끗하게 씻긴 내 차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몸은 흠뻑 젖었지만 말이다. 배가 고파서인지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잠시 할인점에 들러 돼지고기 찌개거리와 막걸리 두병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여전히 전일의 트라우마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덜 마른 흰색 메인 매트리스 커버만 빼고 나머지 건조물은 다시 정리를 했다. 일단 거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니 배고픔이 엄습했다. 오랜만에 거창하게 매운 요리가 먹고 싶어 졌다. 돼지김치볶음에 도전했다. 일단 후추를 뿌린 고기를 프라이팬에 구워서 익혔다. 어느 정도 불맛을 내고 김치와 국물, 고춧가루, 빻은 마늘, 청양고추 두 개를 잘라 넣었다. 아내에게 들은 대로 설탕도 두 스푼, 그리고 굴소스도 넣었다. 어설펐지만 완성이 된 요리는 내 입맛에는 딱 맞았다. 


나는 전자레인지에 데운 햇반과 조금 전 사온 막걸리까지 세팅을 해서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매워서 온몸에 비 맞은 듯이 젖었다. 두부가 있었으면 좋았는데....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대신 구운 계란을 까서 두부 대신 김치와 싸서 먹었다.


배가 불러오니 전일 멘붕과 트라우마 사건에 대해 갑자기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녁에 어느 정도 다 마른 메인 매트리스까지 씌우고 나서 매트, 배게 등까지 완벽하게 세팅이 끝나니 다시 사택에는 이전의 평화와 고요가 찾아왔다. 매운맛으로 땀도 흘리고, 막걸리로 기분도 알딸딸해지고, 몸도 노곤해지니깐 다시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11시쯤 배가 다시 고파지니 다시 전일 먹다 남은 치킨이 생각났다. 나는 거실로 나가서 식탁에 앉아 맥주 한 캔과 함께 편안하게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와인을 쏟고 난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다시는 침대 위에서 와인을 마시지 않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이렇게 각자의 위치와 용도에 맞게 사용할 때 인생은 순조로운 것임을 다시 한번 깊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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