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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총을 들고 신이 되기로 했다

전쟁과 피카소

by 윤이프란츠


어릴 적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나만의 작은 계가 만들어졌다.


그곳은 밀림이었다가, 우주였다가, 전장이었다. 장난감 하나면 언제든 슈퍼맨도, 변신로봇도, 비행기도 될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내게 감히 맞설 자는 없었다. 아니다, 악의 세력은 언제나 세상을 전복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므로 나는 대장이 되어 부하들을 이끌고 세계 평화와 질서를 지켰다. 그토록 오랫동안 수호해 왔던 작은 세계를 이제는 막내가 맡는다. 막내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세계를 다스린다.


기관총, 산탄총, 저격총, 화살, 권총 등 수십 종의 장난감 무기가 집 안 은밀한 곳에 보관돼 있다. 비상이 떨어지면 막내는 망설임 없이 언제든 출동할 태세다. 심지어 참치캔, 조미김, 마이구미, 고래밥, 반창고를 자신의 백팩에 비축해 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무선 랜턴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끈들도 들어있다. 으레, 주말이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집 안에 침입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는 막내의 지휘를 받으며 명령에 따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다. 그래야만 지리멸렬한 전투가 끝기 때문이다.


빗발치는 총알에 아무리 맞아도 막내는 끄떡없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점차 강해진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용맹한 전사로 거듭난다. 여전히 쪼그만 아이지만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만큼은 씩씩한 영웅인 것이다. 사실 그런 전쟁놀이가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봐 걱정한 적도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장난감이더라도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눌 땐 단단히 주의시켰다. 무기는 장난감 세계에 있는 적을 향해서만 사용할 것, 놀이가 끝난 후엔 장난감통에 넣어둘 것, 정해진 놀이시간 외에는 평화를 유지토록 약속했다.


온종일 막내는 집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그래도 체력은 방전되지 않는다. 장난을 걸기 시작하면 화를 낼 때까지도 그칠 줄 모른다. 결국 짜증 난 큰애가 참다못해 내게 일러바치고서야 장난이 마무리된다. 그럴 때마다 아무리 사소한 장난도 계속되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렇게 시작된 일이라고 했다. 단순히 장난처럼 보이지만 특정 아이만 골라서 놀리는 건 해코지와 다를 바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막내가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혼자서 껑충껑충 튀어 오른다. 마치 멈추지 않는 용수철 인형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전쟁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무고한 생명들이 총칼 앞에서 쓰러진다. 한 번 뺏았긴 심장은 다시 뛰질 않는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고, 화마 속엔 참담한 슬픔이 가득하다. 전쟁 소음은 가슴을 찌르며 평온했던 일상을 갈기갈기 찢는다. 폐허 속에 집 잃은 사람들이 숨을 곳을 찾는다. 누군가를 찾던 소리가 철퍼덕 땅바닥에 떨어진다. 캄캄한 하늘에서 빛났던 건 별이 아니라 반짝이던 죽음이다. 전쟁은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걸 시연한다. 누가 인간을 고귀하다고 말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전쟁에선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만 구분된다. 과거에 그가 누구였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싸울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예멘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분단국가로서 전쟁 위험은 상존하다. 대외적으론 휴전 상태이지만, 내부에선 이념 논쟁과 흑색선전이 도를 넘고, 음모와 주술이 판을 친다. 싸움을 종용하는 종교와 이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규합한다.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란 게 망가지고 있다. 모든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희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더 이상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결국 공동체는 공안전과 질서유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타락했다.


1937년 히틀러의 독일군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 전투기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있는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했다. 250㎏ 고폭탄과 50㎏급 폭탄, 1㎏ 소이탄이 느긋한 휴일을 보내던 어린이와 노인, 여자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폭격으로 민간인 사망자 1654명, 부상자 889명이 발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독일군은 게르니카 폭격을 통해 전투기와 폭탄의 성능을 테스트했고, 스페인의 프랑코 반군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민중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다. 잿더미로 변한 게르니카를 보면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신났을 것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전쟁의 비극에 분노하며 대작 《게르니카》를 그렸다. 그리고 비극적인 상황에 절규하는 수탉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반도의 전쟁과 학살 소식을 듣고는 그 유명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공포에 질린 얼굴, 발가벗겨진 몸, 임신한 여자, 놀라서 여자에게 안기는 아이 그리고 총을 들고 무장한 군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것은 곧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 상황에서도 한 아이는 여전히 땅에서 장난질을 치고 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대신해 피카소는 포효하듯 울부짖는 수탉을 그렸다. 순수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수탉은 전쟁이라는 현실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어릴 때부터 비둘기와 같은 새들을 좋아했고, 그의 아버지는 비둘기를 기르면서 피카소에게 새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가 사랑해마지 않던, 살아있는 장난감이었을 새는 어린 그에게 상상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래서 화가가 된 이후에도 비둘기, 올빼미, 닭 등 많은 새들을 그렸다. 그런 새가 지금 엄청 화가 나서 목청을 높여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릴 적 자신의 울타리였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존재였다. 그런데 그 새가 큰 위험이 바로 덮칠 것이라며 사납게 경고하는 것이다.


막내가 좋아하는 레고는 작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블록이다. 블록을 한 개씩 쌓다 보면 새로운 장난감이 된다. 만드는 방법이나 순서가 따로 정해진 건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어떤 모양이 나올지 처음엔 장담할 순 없지만 막상 어떤 게 완성된 걸 보면서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렇게 조립된 장난감을 다시 해체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처럼 보인다. 자신이 창조하여 만든 걸 부수는 행위는 일종의 창조적 파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커다란 덩어리를 잘게 부수어야 또 다른 장난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창조적 파괴는 성경이나 신화 속에서 자주 등장다. 과거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신에 의해 파괴되었던 적이 있다. 타락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신은 홍수를 일으켜 단 몇 사람만을 남겨놓고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이야기는 레고 블록을 해체한 뒤 다시 조립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날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말처럼,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신보다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물질과 력을 위해서라면 른 생명도 함부로 죽였고, 해가 된다면 전쟁도 벌였다. 그러한 전쟁에선 모든 게 무너졌다. 그곳에서의 희망은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과 같았다. 인간 난감 대신 총을 들고 스스로 신이 되어 닥치는 대로 파괴한 까닭이다.



피카소 < 수탉 > (1938)


피카소 < 한국에서의 학살 > (1951)


(참고자료)

*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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