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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씩 고독해진다

by 윤이프란츠



누가 태어날 때부터 환자였던가?


누구나 성장하고 나이가 들면서 예상치 못한 질병이 발생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환자는 없으며 어느 부위에 병이 들지 예측하긴 어렵다. 질병은 나의 불량한 취향이나 성격 때문에 발병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와 무관한 복잡한 사정으로 우연히 발생된다. 물론 전쟁 등으로 초래된 전염병 등의 경우 그것은 인간이 초래한 재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치명적인 질병의 책임 소재나 그 원인조차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만큼 세상 바이러스나 세균이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과거 병 걸린 자는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죄인이라는 등식을 서슴없이 적용했었다.


내가 산재보상 업무하는 동안 겪었던 민원인 중 어떤 누구도 일하다가 질병에 걸리길 바랐던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아픈 상황에서도 일한 것 외에는 잘못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수행하였던 노동과 질병 간 업무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가 불승인이 되면, 노동자는 억울함을 풀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요양비나 약제비, 수술비 등 늘어난 경제적 부담은 결국 자기 몫이 된다. 책임 소재를 알 수 없는 질병을 위해 재해자는 주변 모든 것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의심이 너덜해질 때까지 온종일 허수아비처럼 계를 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 머리에 지혜가 없어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게 아니냐고 자책다.


살면서 질병으로 오랫동안 크게 아팠던 적이 없기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면 몸이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제보단 어제, 어제보단 오늘이 더 나아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신약을 투약해도 신체는 회복과 감퇴를 병행하며 파도 같은 삼차 곡선을 그렸다. 어는 창문으로 전해지던 바깥 햇살을 금방 움켜쥘 것처럼 굴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침대에 누워있는 사정을 보면, 나약한 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제는 맞은편 침상에 나이가 많은 환자 분이 들어왔다가 결국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병원은 삶을 지키기 곳이기도 하나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생명도 있다. 죽은 자는 조용히 물러나고, 산 자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또 다른 걱정을 한다. 나도 그런 산 자 같은 걱정으로 병원생활을 하며, 종종 고독이란 걸 불현듯 는다. 왠지 혼자서만 덩그렇게 병실에서 남아 신음하는 건 아니지, 힘이 달려 신음도 할 수 없가 쓰러지는 건 아닌지,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모두가 '너무 늦었구나'며 안타까워할 것을 걱정한다.


이런 걱정은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남자처럼 청난 속도로 내게 달려다. 그리고 나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의 기대를 한방에 무너뜨린다. 또한 갈무리된 삶 소망과 기도를 휘청이는 촛불로 만든다. 그런 찰나 걱정은 다시 고통 편린이 되기 쉽다. 떨치기 힘든 걱정껴지면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난다. 내 안의 걱정이 날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암 환자란 걸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간만에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며칠 전 도도새의 작가가 남긴 글 문구가 맘에 들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반드시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그의 말처럼 내가 가끔씩 고독한 건, 세상 어딘가에 날 위해 기도해 주는 반드시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스타그램 @dodo-seeker 김선우 작가

*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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