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을 뻗어 111 병동 창문을 톡톡 두들겨 본다.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손 끝에서 느껴진다. 그토록 차가운데도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버섯처럼 날마다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만지고 있으면 왠지 아플 것만 같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길들지 않은 바람이 면역력이 떨어진 나를 상하게 만들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창밖 풍경에 빠져들고 있다. 오늘은 봄비까지 내리면서 검은 땅을 촉촉이 적시고 있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내려도 미세먼지를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오랫동안 미세먼지로 오염되었을 서울 도심 건물들은 번쩍이는 외벽과 스틸공법으로 높은 마천루를 가졌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고 위엄 있는 어떤 형상을 흡사 닮았다. 그래서 도시의 새로운 것은 세련되나 날카롭게 보인다. 또한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정확히 주문을 외쳐야 열리는 알리바바의 비밀 동굴처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건물의 벽들은 투명한 유리로 가득하다. 건물들 사이의 공간을 잰 것처럼, 직선 형태의 유리는 횡단보도, 시내버스, 가판대처럼 네모 반듯하다. 사각형 구조는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수많은 공간들을 안전하게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공기는 사각틀 안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다. 분석기로 채집된 이산화탄소, 미세먼지 등을 통해 공기의 양질과 보호 마스크 착용을 결정할 뿐이다.
내가 생활하는 병동은 감염 예방을 위해 24시간 공조시스템이 가동된다. 그래서 창문이 필요 없어 보인다. 유입과 배출되는 공기 중 오염물질은 여과기를 통해 필터링된다고 한다. 따라서 창문과 일기예보는 내게 신체적으로 거의 영향을 주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추스를 감정의 문제는 남긴다. 그렇게 안전해진 공간 속에 나는 갇혀 살고 있다.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갇혔는지 모르겠다. 결국 살아남는 게 중요한 일이니까.
서울대병원 건너편에는 건축되었다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때 무너져 다시 세운 창경궁이 있다. 낡은 조감도처럼 보이는 창경궁의 전경은 이끼가 잔뜩 낀 큰 바위 주변에 붉은 소나무를 한데 끌어모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오늘 같은 날은 참 쓸쓸한 구석이 있다. 그곳에서 일제가 심었던 대량의 벚나무들은 여의도에, 관람되었던 동물들은 과천에 새로 터를 잡고 옮겨졌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았다.
현재 창경궁은 문화재 복원을 통해 더 이상 창경원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창경궁은 여전히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도리어 창경궁의 부속물이었던 벚나무와 야생동물이 있는 여의도 윤중로와 과천 서울대공원이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대상을 달리 부르는 것만으로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었다.
봄비로 인해 창경궁의 벚꽃들이 급히 시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찬란했던 봄의 생기도 처연한 기운이 되어 수풀 사이로 떨어졌다. 탄핵심판 후 창경궁에서 헌법재판소까지 이어진 대로변에선 함성 소리가 사라졌다. 벌과 나비가 날아들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곳도 초라해졌다. 청백 군으로 나뉘던 시민들이 벚꽃처럼 흐트러졌다.
아침 공기에 차가워진 창문에 뽀얀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내 이름을 새겼다. 서린 김은 오래지 않아 증발했고 이름의 흔적은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흐릿하게 남았지만 그 옛날 자주 불렀던 이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치열한 삶을 다투기 위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을 잊고 살았는지 생각했다. 나는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어 창문에 썼다. 그리고 항상 사랑했고 고마웠노라고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