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고리를 사기 위해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갔다. 가게 입구에 놓인 회전진열대엔 다양한 고리들이 빽빽이 있었다. 자꾸만 눈길을 끌었던 건 맨 아랫줄 땅콩들,만화피너츠(Peanuts)의 주인공인 스누피와 찰리 브라운이었다. 먼지로잔뜩 까매진 얼굴로 손님들을 맞고 있었는데, 썰렁한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린 시절 스누피와 꼭 닮은, 땅콩같이 조그만 강아지가 있었다. 숏다리에 롱바디가 영락없는 비글이었지만 비글은 아니었다. 검은 가면의 쾌걸 조로가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타고 다녔던백마, '실버'라 이름 지었다. 실버는 고상한 이름과 달리 동네방네쑤시고 다녀 일명 '발발이'로통했다. 만만한 개구리나 메뚜기를 쫓긴 했어도 나름 평화주의자여서, 풀밭에 드러눕는 걸 무척 좋아했다. 싸움질엔 별로 소질이 없어 이웃집 개들과싸워 제대로 이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낮에는 활기가 넘쳐 에너지를 다 쏟은 후 낮잠을 즐기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 으쓱 찾아오면 낮과 달리 겁 많은 졸보가 되었다. 뛰어난 후각이나 청각에도 불구하고, 실버의예민한 감각들은 짙은 어둠 속에 묻혔거나 별빛 뒤로 스르르 사라졌던 것 같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낯선 냄새들을 맡았는지 불쑥 짖었고, 가족들 발소리에도 화들짝 놀랐다.아침마다 충혈된 눈동자, 퉁퉁 부은 눈자위는 긴장하며 잠을 설쳤던 흔적들이었다.
피너츠(Peanuts) 땅콩들도 무엇인가 부족한 결핍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스누피는 순수하지만 과대망상과 폐쇄 공포증을 앓았고, 절친인 찰리 브라운은 다정하나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철새인 우드스톡은멀리 나는 걸 싫어했고, 외동딸 루시는 고집 센 심술쟁이였고, 철학자 라이너스는 이불에 집착하는불안증을 가졌다. 귀여운 땅콩들은 그런결점과 약점에도일상을 살아간다는 게, 누군갈 좋아한다는 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어 했다.상상을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작가나 비행기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실수와 잘못이 반복되더라도 더 이상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렴풋이 땅콩들이 보여주었던 것 같다.
그토록 작고 단단한 것들을 나는 좋아했다. 프라이팬 열기가 격렬할수록 고소한 맛이 더해진 땅콩들도 그랬다. 잘 구워진 땅콩들은 바셀린을 듬뿍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흘렀고, 입안에서 씹힐 때 눈 밟는 소리가 나서 좋았다. 땅콩밭을 기웃거리며 몰래 씹었던 생땅콩의 비릿함마저도 특별했다. 땅콩으로 창조된 모든 것들이 나름 좋았다. 단, 땅콩버터는 상상만으로도 갈증이 느껴지므로 목록에서 생략한다.
여름 햇살을 닮아 노랗게 피었던 땅콩밭 꽃들을 기억한다. 초록들이 우거진 텃밭 위로 찬란한 노을처럼 솟았던 꽃들, 날이 저물고 조금씩 식어가면 어느덧 땅 속 열매들이 주저리 열렸다. 그런데 나는 땅콩을 좋아했을 뿐 땅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줄기를 힘껏 뽑았을 때 줄기 끝에 딸려오는 것들이 전부 다 뿌리인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깊숙이 땅 속에 숨어있던 게 뿌리 말고 다른 게 있을 거란 상상력은, 나만 부족했던 것인지.
땅콩은 땅 위에서 꽃을 피우고 시들면, 꽃줄기가 땅에 떨어져 땅 속에서 열매를 맺는 식물이란 걸,나는 미처 몰랐다.낙생화(落花生)라는 이명(異名)이 있다는 사실도 불과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수정된 꽃들을 흙에게 맡겨 단단한 열매가 될 때까지, 찬 서리가 내리기 전 옹골찬 열매가 되길 소망했던, 땅콩들은 콩과 견과류 사이 어디쯤에선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땅콩들은 거칠고 척박했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루하게 지속된 삶의 문제들을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뿌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상상을 통해 불안과 공포들을 만들어냈지만, 또한 무한한 상상을 통해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구원해 낼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