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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Mar 02. 2024

여기 서서 기다리는 건

Stand here & Think about someone

사랑을 잃는 건 절망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겪어야 하는 사건이다.


늘 내 곁에 있었고 있기로 했던, 사랑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일들은 보통 화창한 날, 갑작스레 휘몰아친 돌풍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찰나 방심했던 망둥이들이 불안을 느끼고서 정신없이 갯벌 위를 다름질하지만, 결국엔 그물에 걸려 외마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는 것.


사랑이란 서로의 다름과 틀림을 인정하고 관용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기 실수를 변명하기 위해 마땅한 이유를 먼저 찾지 않고, 괴로웠을 상대방 마음을 우선 헤아린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두려운 건 어긋난 감정이나 날 선 갈등일 테지만, 여권이 만료된 여행자가 본국으로 들어간 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정과 비슷하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이별이라는 슬픈 현실을 겪었지만 여전히 삶의 문제로 남아 우리를 괴롭힌다.


진정한 사랑이란 게 과연 무엇일지, 그리고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사랑에 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냈지만, 어떤 질문에도 선뜻 명쾌한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밤을 새워가며 번민한 끝에 겨우 닥쳐올 불안을 잠재웠다 생각하다가도, 또다시 비슷한 불안이 밑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면 기어코 우리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말았다. 결국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야 쓸데없는 잡념들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겨우 문 밖을 나설 수 있을 때까지 홀로 캄캄한 방구석을 천천히 기어 다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급작스레 떠났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이 사라졌던 골목길을 두리번거렸다. 지나던 행인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줄 알고선 내게 눈을 흘깃거렸다. 나는 그녀가 떠났던 길과 돌아올 길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맞은편 길들도 한참을 살폈다. 혹시라도 어디쯤에서 만나자고 정해놓고 간 건 아닌지, 내가 듣진 못한 게 아닐까 싶어 짐작되는 곳들을 늦게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다 같은 곳을 선회하고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돌아오기에 충분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아직 머리카락조차 보일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어렴풋한 흔적들이 그림자를 늘어뜨려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찾아낼 테고, 그때쯤 나는 무서움에 조금 울기는 했어도 내색 하나 없이 씩씩하게 굴 것이라고, 속엣말로 계속 중얼거렸다.


결국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별의 기별조차 보내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잃어도 괜찮을 만큼 강하지 않았고, 그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아마 그런 시간이 있었다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저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녀가 아주 길고 먼 여행을 간 것일 뿐, 언제라도 여행을 마치고 내 곁에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게 사실이다. 또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아랫배를 쿡쿡 짓누르는 무거운 허무감을 그래야만 떨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어른이 되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나만 바라 보고 사랑해 주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왜, 꼭 그러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지금도 몹시 불만이다. 차라리 몹쓸 아이로 남아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어른 세계로 발을 디뎠을 때부터, 일상의 풍경들은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었지만, 더 이상 동일한 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선 조건과 배경으로 누군가를 가늠했고, 사랑할 자격에 대해 거리낌 없이 논의했고, 사랑할 만한 걸 찾기 위해 너도나도 분주했다. 사랑은 생산자 표시가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 같아서, 불량품 판정을 받으면 교환되었고, 쓸모에 따라 폐기되었고, 주기적으로 교체되었다. 어른이 된 이상, 나 역시 사랑에 대한 기호와 취향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소모품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어느 날 문뜩 봄이 돌아섰음을 알았다.


봄이 오는 걸 미처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희뿌연 먼지로 잿빛이 된 하늘을 끌어안고선 봄이 바투 서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각종 매연과 소음으로 도시가 자욱한데도, 봄은 쓰러져 가는 것들을 살리기 위해 따스한 온기와 촉촉한 비를 가득 품고 있었다. 잠시 갔다가 되돌아온다는 뜻을 알지 못 했던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있었던 봄이 지금 내게로 다가오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다. 길에서 한 눈 팔다가 손을 놓치고선 불안에 떨었던 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선 나를 찾았던 엄마가, 어느 날인가 영영 사라지고 없었던 그 골목에도 다시 봄은 오고 있었다.  


나는 여기 서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홍대 앞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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