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칸다 포에버 Jun 28. 2021

궁상의 결과

평소에는 안 하다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자리를 잡으면 다른 짓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청소를 하고 책장 정리를 하는 등 우선순위와 상관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움직이는 그런 일들 말이다. 나중에 갑자기 왜 이 일을 했는지, 그 일을 함으로 소비된 시간을 떠올리며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그 후회는 별 소용없다.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똑같이 행동한다.


이번에 있었던 일도 그랬다. 공부하겠다고 책상 앞에 자리 잡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책이 아닌 책상 바로 옆 책장이었다. 왜 이리 책장이 답답해 보이던지. 책장을 정리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책장을 정리하다 한쪽에 쌓여있는 대학교 전공 도서들을 봤다. 대학을 졸업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버리지 않았던 건 한 교수님의 말 때문이었다. 이유는 잘 떠오르지 않지만 전공 도서를 졸업 후에도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런 책들이 이제 와서 짐처럼 느껴졌다. 두껍고 이름은 거창한 책들을 보며 책장에 장식처럼 두며 폼은 잡을 수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안 펴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은 책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쉽지 않기 위해 훑어보는데 대부분 새 책이 아닌 헌책방에서 샀던 책이었다. 책을 보니 감상에 빠졌다.


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난했다. 집에서 인색하게 살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학교에 다녔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보던 전공 책은 대부분 헌책이었다. 가까이 있는 서점에서 새 책을 찾기보다 멀리 있는 헌책방에 가서 손때가 묻은 책을 찾았다.


점심 식사는 편의점 삼각 김밥이나 1500원짜리 핫바로 때우고 너무 배가 고프면 학생 식당 밥을 자주 먹었다. 학교 앞 어디가 맛있는 지도 잘 몰랐다. 당연히 간식이나 차는 안중에도 없었다. 몇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별다방, 콩다방 등 내 기준으로 값비싼 커피를 항상 들고 다니던 사람들을 보면 돈 아까운 줄 모른다며 혀를 찼다. 돌이켜 보면 그 혀는 부러움의 혀였다. 나도 먹어보고 싶은데 그러지 않아서 부러움을 조금이나마 이겨보겠다며 한 행동이었다.


내 위치를 ‘수저론’에 빗대자면 나는 흙수저보다 무수저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더 상황이 열악한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나의 상황이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내 행동은 절약이 아닌 궁상에 가까웠다. 그때 ‘돈 좀 많이 써볼걸’ 하는 생각도 든다. (당연히 탕진하면 안 되겠지만) 그 소비는 단순한 욕구 해소 활동이 아닌 다양한 경험을 위한 소비 활동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아끼며 경험할 기회를 버렸다면 다른 이들은 돈으로 단순한 소비를 한 게 아닌 경험을 샀다. 돈을 아끼겠다며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세상과 단절을 자초했다.


그 결과, 지금 나는 너무 모르는 게 많다. 가령 여러 사람과 카페에 가면 창피할 때가 있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지금이야 알지만, 예전에는 ‘허니 브레드’가 뭔지도 몰랐으니.  내가 돈을 조금이라도 쓰며 여러 경험을 해보려고 했다면 더 나은 내가 현재를 살고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모르면 순수해 보이지만 나이를 먹고 모르는 게 많으면 한심해 보인다. 남에게 우스갯소리든 진짜 비난이든 지적당하면 너무나 창피하다. 모르는 게 너무나 많은 나는 나잇값을 못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과거 궁상맞은 행동이 초래한 결과를 맛보는 중이다. 그 맛이 그다지 달콤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이것저것 해보려고 한다. 여전히 몸에 밴 궁상이 뭐라도 하려 할 때 붙잡지만 사치를 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니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쟁과 우리 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