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인에게 소개팅 제안을 받았을 때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제안이 자주 없을뿐더러 만남에 대한 목마름이 최고치에 달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 욕구는 성별과 관계없었다. 도시에 살고 있지만 마치 속세를 떠나 지내듯 생활했기에 누구 하나 붙잡고 대화가 무척 하고 싶었다. 근데 그 대상이 이성이라는 것은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첫 만남에서 실례가 되지 않으려 머릿속에서 고안했던 민감하지 않은 이런저런 질문 중 하나는 취미였다. 상대가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기에 답을 예상하며 물었다. “무슨 영화를 좋아하세요?” 로맨틱 코미디 정도를 생각했건만 돌아온 답변은 <분노의 질주>였다. 이름만 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화였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던 이유는 취향 때문이었다. 내게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의미 없이 양산되는 액션 영화였다. 여기저기 다 부수고 다니며 결국 승리하며 끝나는 영화는 관심 가는 장르가 아니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마동석 유니버스라고 불릴 만큼 배우 마동석이 나와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며 한 방에 사람들을 날려버리는 영화가 많이 있다. 분명 내용은 다르지만, 특유의 액션 때문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들이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출연하는 제이슨 스타뎀은 미국의 마동석이라고 칭하고 싶을 정도로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액션 영화를 찍었다. 그가 시리즈 중반에 출연한다는 말을 듣고 그 시리즈에 관심을 더 접었다. 뻔한 영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폭주족과 여러 사건·사고의 연관된 단서를 찾기 위해 경찰 브라이언(폴 워커)은 폭주족으로 위장해 자동차 개조 정비소에 취업한다. 그리고 만난 도미닉 토레토(빈 디젤)와 자신의 차를 걸고 내기 경주를 한다. 이게 1편의 이야기고 이야기가 늘어갈수록 대적하는 집단과 이용 운송수단, 무기 전술 등등이 1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진다.
폭주족 끼가 다분하지만, 우리 일상 속 평범한 카센터 직원인 줄 알았던 도미닉이 엄청난 속도광인 것도 모자라 괴력의 소유자요, 다양한 무기를 다룰 줄 아는 특수요원급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이야기도 커져야 하기 때문에 출연 배우는 물론 그들이 선보이는 액션도 그만큼 화려하다. ‘제작비 많이 들어갔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
소개팅 첫 번째 만남 후 두 번째로 만날 때는 상대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마침 그 당시 8편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이 막 개봉했을 때라 IMAX로 영화를 예매했다. 만남이 다가오기 전까지 내가 했던 일은 영화 전편을 정주행 하는 것이었다. 대화의 접점 마련과 영화 이야기 흐름 파악을 위해서였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싶은 액션은 둘째치고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자동차 액션이었다. 미녀의 수신호와 함께 경주가 시작되고 우리 일상에서 펼쳤다가는 경찰서 직행할 묘기 운전을 선보인다. 이 영화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자동차 액션의 시작인 것이다. 무분별한 파괴가 아닌 화려한 운전이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것이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이 영화의 특징이다. 또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보다 여운에 남는 것이 이것들이다. 시리즈 몸집이 커지다 보니 이야기는 점점 산으로 가거나 억지로 늘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장면과 파괴에서 나오는 쾌감이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이 얌전했던 소개팅 상대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정주행 하기에는 눈과 엉덩이가 너무 아프지만 묘한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소개팅 상대와 영화관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봤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IMAX를 고집하지 말았어야 했다. 관객이 너무 많아 앞자리밖에 남은 자리가 없었고 그 큰 화면을 눈에 담기 위해서 목을 꺾어 봐야 했다. 영화를 보기 위한 무리한 목 액션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에 영화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러닝 타임은 왜 그리 길던지. 영화가 끝난 후 찾아오는 고통이 영화 제목만큼이나 익스트림했다.
빈 디젤
영화의 주인공인 토레토와 엮이면 그 사람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죽든지 아니면 형제가 되든지. 토레토가 생각하는 형제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유행했던 관계인 ‘깐부’와 비슷하다.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 끈끈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토레토와 친구들은 큰일을 화려하게 해내며 속편이 나올 때까지 하나뿐인 목숨을 부지해 나간다.
나도 소개팅 상대와 잘 되었다면 그런 관계를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있겠지. 흑흑. 아무튼 그녀의 취향 덕분에 나는 관심에 없었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고 시리즈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지금도 신작이 나올 때면 찾아보고 있다. <분노의 질주>는 소개팅과 엮기엔 어색한 장르지만 엮일 수밖에 없었던 징글징글한 인연의 영화였다.
외전인 분노의 질주: 홉스&쇼도 재미있다
한 편이라도 보지 않은 이가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을 권해보고 싶다. 말도 안 돼 보이는 액션에서 묘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빈 디젤이라는 배우의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며 보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빈 디젤에게 이 영화는 흥행은 물론 동료이자 형제에 가까웠던 배우 폴 워커의 유작이기도 한 영화이기에 영화 외적으로도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