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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May 23. 2022

오늘은 어떤 날일까?

노동요 - 철도 인생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일은 적게 하며 월급은 꼬박꼬박 챙기는 ‘월급 루팡’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 속 나는 조금 다르다. 눈앞에 놓인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피곤해한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삶을 살면서 일을 더욱 귀찮아하게 됐다. 일을 싫어하는 다른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나는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겁이 많아 어렸을 때는 모험을 극도로 꺼렸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지니 겁을 상실하면서 완전 극에서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모험하기 싫어한다. 이곳의 일은 규칙성이 있는 일보다 돌발적인 상황이 조금 더 많다. 그러다 보니 순간적인 판단과 기지로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때가 많다. 덕분에 둔했던 내가 순발력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지만 특별히 감사했던 적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별로 없는 회사라면 회사 내부의 일만 처리하면 되지만 철도는 회사 내부의 일을 하면서 고객 응대를 해야 한다. 역무를 기준으로 역 내부 업무는 역 안의 일을 처리하거나 본사, 본부의 요청에 따른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고객 응대는 변수가 많다. 간단한 안내는 마음 편히 할 수 있지만 민원 해결(진상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여기 속한다), 사고 수습 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함부로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입사 초기만 해도 오늘은 어떤 날일지 기대보다는 걱정을 자주 했다.


많은 회사가 그렇겠지만 근무하는 하루는 해야 하는 일의 수와 강도를 기준으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이 없는 날, 적당히 일이 있는 날, 일이 많은 날. 일이 없는 날은 주말이나 명절처럼 조용한 날이다. 내부적으로 할 일과 고객 응대 모두 적다. 주말과 명절에 출근한다는 단점 외에는 조금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아서는 안 되며 해서는 안 될 말도 있다. 그 말은 바로 ‘일 없다’는 말이다. 소방, 경찰공무원들의 업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런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는 순간 일이 터진다는 것을. 철도도 비슷하다. 그런 말을 뱉으면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는 때가 잦다. 주말, 명절도 횟수가 적을 뿐 예외는 아니다.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나쁜 마법사 볼드모트의 이름을 절대 말하지 않던 것처럼 일 없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려 조심한다. 마음으로는 외치고 싶어도 참는 때가 허다하다. 나의 무사한 퇴근을 위해서 입이 가벼운 사람도 조금은 무거워지는 곳이 철도다.


그래서 차라리 적당히 일이 있는 날이 더 좋을 때도 한다. 적당하다는 것은 간단하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간단한 업무를 꾸준히 처리하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어떤 보고해야 할 사항을 처리하면 또 보고 요청이 들어오는 것의 반복이다. 아니면 고객 응대와 대기를 반복하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내가 업무 태만은 아니었다는 자기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정확한 주기는 없지만 일이 한꺼번에 몰리는 날이 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하다가 뜻하지 않게 공교로운 일을 만났을 때 쓰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철도에서 일하다 보면 자주 떠오르는 때가 많다. 이 일이 몰리는 것을 단계로 나누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말 그대로 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때다. 이때는 내부 보고해야 하는 일이 많은데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자면 공교롭게 여기저기 필요한 일이 몰리는 때도 있지만 교대근무를 하다 보니 폭탄 돌리기를 하듯 너 나할 것 없이 서로에게 일을 계속 미루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내가 직면하게 되는 경우도 잦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무실을 찾는 고객의 수가 많고 그 주기가 빠르다. 또한 각종 전화와 민원이 쌓이고 쌓여 해결해야 한다. 이 단계는 경험이 부족한 때는 버겁지만 경험이 쌓이면 수월히 풀어나갈 수 있다.


2단계는 1단계에 사고가 섞일 때다. 쌓인 일을 해결하는 중에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나 수습해야 할 때가 있고 사고가 일어나서 수습하는데 눈치 없이 일이 잔뜩 밀려오는 때가 있다. 이 단계부터 정신이 조금씩 사나워진다. 자칫 잘못하다간 정신이 무너질 수 있어 집중하면서 일해야 한다. 동료가 바로 옆에 있다면 협력해서 처리가 수월하지만 일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날엔 일을 마치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단계는 사고가 연쇄적으로 터질 때다. 간혹 일어나지만 접하면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때는 간단한 일은 신경 쓸 새가 없다. 선로에 뛰어드는 사람, 열차 사고로 인한 열차 지연 등 뉴스에서나 볼법한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어떻게든 빠르고 안전하게 수습해 열차 운행을 정상화해야 한다. 사명감이 투철한 것도 아님에도 오로지 그것만 생각하며 일을 처리하는 나를 보게 된다.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해결되지만 그 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빠진 채 일을 하느라 나는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드라마처럼 매일 사건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계속 무는 것은 아니다. 또 큰일을  치르고 나면 조용해지는 날도 있다. 나는 이런 날을 ‘액땜한 날’이라고 부른다. 연말연초에 큰 사고를 겪으면 액땜했다면서 복이 들어올 것을 예상한다. 이처럼 교대하자마자 사고가 터지거나 묵직한 일을 해결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이 고요함은 마음에 평안함을 주기도 하지만 괜한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조용히 넘어가면 다행이지만 다른 사고가 터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의 삶을 사는 나는 편한 게 최고라고 여기게 됐고 일하는 동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 그런다고 내 마음대로 하루가 펼쳐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가끔은 내 안에 변태성이 있는지 바쁘고 힘들 때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얼굴은 인상을 구기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환호를 지르는 나를 보게 된다. 하지만 신나는 기분과 별개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몸이 피곤해진다. 온 신경을 집중해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도에서 일하는 동안 일이 생긴다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비정상적인 것일 수 있다. 일을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 쾌감과 뿌듯함은 정말 좋지만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어떠한 이례 상황이든 경중과 관계없이 일어나지 않는 게 훨씬 좋다. 나는 항상 바란다. 제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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