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그 사람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웬만하면 영화를 볼 때 명 연기와 발 연기를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명 연기는 무엇일까? 어떤 장면이든 누구와 함께 있든 캐릭터를 톡톡 튀게 살려 놓는 것? 그것도 명 연기지만 그것만이 명 연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어떤 옷을 입더라도 눈에 띄게 잘 표현해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옷을 입더라도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도 명연기라고 생각한다.
이에 부합하는 배우가 덴젤 워싱턴 같다.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서 많은 흑인 배우를 봤지만 기억에 남는 이 중 한 명은 덴젤 워싱턴이다. 영화제 수상으로 연기를 인정받은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본 것은 아니다. <존 큐>, <맨 온 파이어>, <리멤버 타이탄> 등 내가 본 덴젤 워싱턴의 영화는 엄청난 스토리가 담겨 있거나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블록버스터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킬링 타임 영화들이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연기를 보며 시선을 돌리거나 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한 가정의 가장 존 큐(덴젤 워싱턴)는 아들이 심장 이식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엄청난 수술비에 도움받을 수 없어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없는 존 큐. 최후의 수단으로 병원을 인질로 삼는다.
암살 전문 요원 존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친구의 권유로 보디가드로 일하게 된다. 대상은 사업가의 딸 피타(다코타 패닝). 피타의 모습에 존 크리시는 닫은 마음을 열어 간다. 하지만 크리시는 피타를 위협하는 세력을 막지 못하고 쓰러진다. 회복한 크리시는 복수를 다짐한다.
고교 미식축구가 인기인 버지니아주에서 흑인 고등학교와 백인 고등학교가 통합하는 일이 생겼다. 이 통합된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에 허만(덴젤 워싱턴)이 감독으로 임명된다. 팀원은 물론 코치진 사이 분열이 일어난 팀을 허만은 자신의 리더십으로 하나로 만들어 나간다.
이 세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이 연기하는 배역은 단순하게 보면 그냥 아저씨다.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이나 말이 전혀 튀지 않는다. 하지만 어딘가에 실재하고 있을 것처럼 연기를 똑똑하게 잘 소화해낸다. 연기를 잘한다고 하면 특징이 강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광인, 환자, 극악무도한 범죄자 등 설정이 있는 캐릭터를 잘 표현하는 것만이 흔히 말하는 미친 연기가 아니다. 평범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연기가 진짜 미친 연기인 것 같다. 연기에 빠져 이야기를 읽는 것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보며 이야기를 읽어가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다. 누군가의 기억에 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상적인 것을 보인 사람이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남길 수 있다. 배우의 연기도 그럴 것이다. 인상적인 연기를 한 배우는 호평을 받고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덴젤 워싱턴은 내게 성패와 상관없이 어떤 영화라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펼친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