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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Aug 22. 2022

질투는 나의 힘

미국 프로농구 NBA의 역사 속에서 GOAT(The Greatest Of All Time)로 꼽히는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다. 여섯 번이나 우승하고 각종 기록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등 실력은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로 빼어났다. NBA 하면 마이클 조던이었을 정도로 NBA의 아이콘이었고 여전히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나오고 있다. 은퇴한 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농구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 선수를 통틀어 여전히 고수입을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한 구단의 구단주까지 하고 있다.


그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은 그의 성격이다. 농구 팬들은 우스갯소리 반, 진심 반으로 그의 성격을 쪼잔하다고 말한다. ‘쪼잔 왕’ 마이클 조던. 경기에 지거나 남의 도발을 받으면 흘려버리지 않고 기억해 다음 경기에 박살을 내버렸다. 자기 발전을 위해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까지. 쪼잔하다는 것은 말로 들어도 글씨로만 봐도 속 좁아 보이지만 마이클 조던의 쪼잔함은 쪼잔함이 보일 수 있는 모습 중 최고이지 않을까.


나도 마이클 조던의 쪼잔함에 절대 지지 않는 한 쪼잔하는 사람이다. 남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며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너무 큰 다른 점이 있다. 마이클 조던은 본인에게 닥쳐오는 승부를 이겨냈고 나는 지지부진하다는 것이다. 부러우면 이겨냈던 그와 다르게 나는 부러워만 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은 이렇게 힘들다.


세상의 성공을 나도 맛보고 싶어서 덤빌 때 누군가 네 강점이 뭐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 모범 답안처럼 나오는 건‘성실함’이었다. 성실함이란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기질은 아니다. 무슨 상품이나 모형처럼 그 형태가 보여서 말과 함께 딱 꺼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면을 쓴 성실함도 있다. 처음에는 성실해 보이다 점점 처음과 달라지는, 쓸수록 점점 줄어드는 치약처럼. 그래서 성실함은 대개 오래 보아야 알아볼 수 있다.


어떤 일을 해도 꾸준히, 열심히 했기에 강점으로 말하는 기질이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나는 성실하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에게 나를 홍보하기 위해 거창하게 포장해 놓은 포장지 같다고 해야 할까. 마치 언론에서 프레임을 씌우는 것처럼 나도 남을 속이기 위해 이미지를 쌓다 보니 ‘아, 나는 성실해.’라고 자기 최면에 빠진 것처럼 느끼곤 한다. 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일을 미루며 게으르게 산다. 그런데 계획은 빠듯하게 세운다. 머리와 몸의 성실함이 다른 것이다.   


그런 부실한 성실함 탓인지 나는 이룬 게 없다. 결혼도 못 했고 집도 차도 없다. 이게 성공의 절대적 척도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데 못 하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과 따라오는 패배감이 달갑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성실히 잘해온 것은 밥을 꾸준히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려운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내게 하루의 의미와 보람을 주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좋아하는 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지 오래고 2002년 환호하며 봤던 월드컵의 주장인 홍명보 선수의 그때 나이가 지금 내 나이가 되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무엇을 해도 될 것 같은 패기는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줄고 있다. 그만큼 꿈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기준도 낮아진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런 것처럼 느껴져 참을 수 없이 힘들다. 다른 사람을 보면 부럽다. 각자 노력이든 운이든 뭔가 있으니 해냈고 지금도 뭔가 하지 않을까. 남들 잘 사는 모습을 보면 내가 초라하다. 연락이 뜸해져 관계가 소원해진 이들의 소식을 우연찮게 접하면 ‘아 그때 친하게 지낼걸. 더 잘해줄걸.’ 속물 같은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 학교에서 같이 책 만들던 아이가 알고 보니 유명 정치인의 아들인 경우도 있었고 동아리에 잠깐 몸담다 나간 어떤 친구는 최근 TV에서 억대 매출을 자랑하는 사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글을 쓰고 유튜브를 보면서 낄낄대는 게 고작인데.


아무튼 부러워서 죽겠다. 그렇게 질투 속에서 사니 사는 게 재미가 하나도 없다. “아, 재미없어.”가 말버릇이 되었다. 이 ‘노잼 시즌’은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사춘기라면 조금만 지나면 불혹을 바라보는 시기에 왜 철 늦게 찾아왔느냐는 것이 불만이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밤에 거리를 달리면 조금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아 요새 자주 달리고 있다. 끓는 피를 주체 못 해 난리 치는 야생마도 아닌데. 이제는 도가니 걱정도 해야 할 나이인데. 이것도 임시방편이다. 여전히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 부러움의 고통은 슬픔을 몰고 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건 대학생 때 많이 느꼈던 건데, 사회학과임에도 사회학자 하나 모르는 나와 다르게 학자와 이론에 빠삭하게 알고 수업 때 줄줄 말하는 학생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다. 나름대로 공부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지금 그걸 복기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살고 있다. 언제나 저기압에 살고 있었다니.


그렇다고 막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뭘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이것저것 공부하고. 운동하고, 놀기까지. 정기적으로 끊임없이 뭔가 하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꾸준히 영양을 섭취하고 운동하는 것. 이런 활동에서 나오는 효과가 내일 당장 드러나거나 눈에 보이는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훗날 건강의 변화를 체감하고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차이가 생기기도 하니까 나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조금은 조급함은 놓기로 했다.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결승점은 같다. 속도만 조금 다를 뿐이다. 시기 어린 질투만 하다 세월을 보내지 않겠다. 경쟁에서 승리만 추구하는 태도를 갖겠다거나, 나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은 없다. 기왕 기질을 타고난 이상 질투를 나의 힘의 원천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도 저도 아닌 다기망양의 결과를 낳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뭐라도 되지 않을까? 그런 바람으로 지금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루틴을 이어가고 있다. 쪼잔 왕은 아니더라도 쪼잔부 장관 정도는 노리며. (하다못해 쪼잔 회사 취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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