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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Jan 15. 2020

그 남자의 한 방

법정

평소 ‘한 방’에 대한 로망이 있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한 번에 전세를 뒤집어버리거나 기세를 꺾어버리는 능력.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스타 크래프트> 중계를 볼 때 프로게이머 ‘한방 토스’ 임성춘의 한 방이 제발 터지기를 기다렸으며, 만화 <슬램덩크>에서도 정대만, 신준섭의 줄기차게 들어가는 삼점 슛보다 능남고 유명호 감독의 무시를 한 방에 꺾어버린 권준호의 삼점 슛이 더 짜릿했다. 이 짜릿함을 삼국지에서도 느끼게 한 사람이 몇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이름처럼 똑 부러지게 판단할 것 같은 남자. ‘법정’이다.

나는 법정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특성을 몇 가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2인자 포지션. 뭐든 잘하는 ‘엄친아’를 싫어하진 않지만, 그보다는 덜해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물에게 더 눈이 간다. 전자를 제갈량이라 한다면 후자는 법정이다. 제갈량의 업적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법정은 조조와 유비의 한중 쟁탈전이 낳은 스타였다. 조조의 명장 중 하나인 하후연을 계략으로 꺾어버렸으니 말이다.


둘째로 약간 독특한 성격. 법정은 주군인 유비와 그의 군사인 제갈량에게 말에서 물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보통이라면 싫은 소리를 들으면 ‘네’할 텐데 말이다. 지지 않고 하나하나 따지면 얄미울법한데 맞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높이 여겼던 것으로 보아 법정의 능력은 훌륭했던 것 같다. 이렇게만 끝내면 용기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포장되겠지만 법정은 독특한 사람이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을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다고 하니 좋게 말하면 세심하고 나쁘게 말하면 까다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엄친아 제갈량에게 꿇리지 않으려면 이런 특징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삼국지를 게임으로 먼저 접한 나에게 법정은 처음에는 식스맨 이미지가 강했다. 식스맨 이미지가 굳어진 이유는 다른 괴물들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능력치 때문이었다.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에서 법정은 한 마디로 ‘B급 문관’이었다. <영걸전>에서 법정은 주술사, 군악대, 수송대가 아닌 보병이었다. 무력이 높지 않아 공격력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력도 압도적으로 높은 게 아니었다. 80대의 능력치로는 ‘둔갑천서’를 사용해 주술사로 클래스를 바꾸기에는 둔갑천서가 아까웠다. 공격 책략인 ‘화룡’이 적에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별동대로 출진하는 분기점에서는 회복요정으로 요긴하게 쓰이긴 하지만 아쉬움이 가시진 않는다.


<공명전>에서는 어떤가. 제갈량의 북벌이 주요 내용이었기에 지략가로는 2인자 급이었던 그의 활약은 나오지도 못하고 단역 출연으로 끝났다.


조조가 주인공인 <조조전>에서도 그다지 대접받지 못했다. 책사 계열이 아닌 풍수사로 등장해 화끈한 공격 책략은 쓰지 못하고 뒤에서 회복 책략만 썼다. 그것도 적으로 출연해서 말이다. 지력도 80대. 가장 활약이 빛났던 정군산 전투에서도 황충과 대화만 나눌 뿐 하후연을 위기로 몰아버리는 기지는 발휘되지 않았다. 


영걸전에서는 이유 모를 홀대 때문에, 공명전에서는 시기가 맞지 않아, 조조전에서는 적이라는 이유로 B급 이미지와 저평가를 벗어날 수 없었던 법정이다. 그래도 나는 법정을 아꼈다. 카메오 급으로 출현해도, 적으로 출현해도 말이다. 잘 정리된 수염과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마지막 공격을 법정에게 맡기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에서는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발전하는 능력으로 내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준수한 통솔력과 빼어난 지력(그래도 조금은 아쉽다.)으로 전투에서 활약할 기회가 많았다. 일러스트 또한 계속 멋있어졌다. 처음에는 ‘간옹’만큼의 푸근함은 없었지만, 그냥 ‘훤칠한 아저씨 1’에 가까운 이미지였는데 점점 날카로운 책사 이미지로 변했다. 내가 상상했던 법정의 이미지를 잘 끌어낸 것 같았다.


삼국지에는 수많은 상남자가 나온다. 손권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무기 난도질을 막아낸 주태, 적은 병력이나 엄청난 패기로 오의 군사들을 막아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장료, 허구일지 모르지만,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어온 관우 등 모두 남자 중의 남자다. 하지만 상남자 이미지는 장수들일 대부분 가진다. 하지만 펜으로 칼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남자, 한 방으로 전세를 뒤엎은 남자 법정도 상남자의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정사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에 평에 따르면 법정은 조조의 정욱, 곽가에 비견된다고 했다. 제갈량도 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관우와 장비의 죽음에 분개해 전쟁을 준비한 유비를 막았을 것이며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형세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니 얼마나 뛰어난 모사였는지는 알 수 있다. 


물론 단명을 세상을 떠났고, 성질도 더럽고, 인상을 강하게 남긴 전투가 정군산 전투밖에 없다지만 촉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디딤돌이 되었던 것이 법정이기에 윤택함을 더하는 데 한몫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게임 삼국지가 새로운 시리즈로 나온다면 정군산에서 하얗게 불태운 법정의 한 방이 더 부각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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