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어나온 배를 바라보며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을 지나 몸을 절로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을 겪는 중에 내 배가 좀 더 앞을 향한 것을 봤다. 배달 앱에 푹 빠져 이것저것 시켜 먹는 삶을 살았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꾸준히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날이 조금 따뜻해질 무렵 몸을 수그릴 때 뱃살이 한 겹 더 늘어난 것을 보며 체중감량의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식이요법에 중점을 두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효과가 있다 해도 단식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먹을 것을 즐기며 살을 뺄 방법을 원했다. 그래서 운동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달리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운동장이든 동네 산책로든 뛰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의지를 꺾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미세먼지. 내 거친 들숨, 날숨 과정에서 반갑지 않은 손님을 폐로 들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땀 흘릴 수 있는 다른 운동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발견한 것이 있으니 바로 <빌리의 부트 캠프>(Billy's Boot camp)였다.
빌리의 부트 캠프
빌리의 부트 캠프는 공수도 챔피언인 빌리 블랭크스(Billy Blanks)가 1989년에 처음으로 계획하고 제작한 다이어트용 비디오이다. 빌리 아저씨는 태권도와 복싱을 합쳐 만든 ‘태보’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미디언 박나래가 <나 혼자 산다>에서 헉헉대며 따라 한 운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작을 제대로 따라하면 800kcal를 소모할 수 있다는 말, 한 달 동안 열심히 했더니 2~3kg이 거뜬히 빠졌다는 말을 들으니 솔깃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부트 캠프에 입소했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했기 때문에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패기와 함께 말이다.
유튜브에는 다앙한 빌리 아저씨 영상이 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상은 시즌1 영상이다. 이 영상은 Basic, Ultimate, AB, Cardio 총 4개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하체와 복부를 집중적으로 자극하거나 팔굽혀펴기 등의 근력 운동, 복싱과 태권도 동작으로 몸 전체를 움직이게 만든다. 빌리의 부트 캠프는 빌리 혼자서 진행하지 않는다. 콘셉트는 군대 훈련 느낌이며 콘서트장에서 떼창하듯 떼로 몰려 운동한다. 빌리 아저씨의 갈굼에도 뒤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은 군소리하지 않는다. 빌리 양옆의 좌청룡 우백호를 필두로 서너 줄로 세워놓고 동작을 따라 하는데 인도 카스트 제도와 비슷해 보였다.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숙련자부터 초보자 순으로 서열을 나눠 뒤로 갈수록 초보자를 세워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빌리 아저씨는 동양의 닌자나 무술 같은 데 환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외국 영화를 보면 항상 감초 역할을 맡은 서양인은 격투 장면에서 항상 촐싹대며 화려한 손동작을 펼친다. 여기서도 그런 게 있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할 때가 되면 그냥 해도 되는 것을 손을 기체조 하듯 이리저리 휘두른다.
새삼 섭섭한 것은 여자 참가자들에게는 군대 조교 행세를 하며 갈구면서 조금씩 정을 주지만 남자 참가자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화가 난다. 결국 그도 남자였다. 여심에만 신경 쓰는 차가운 남자 빌리.
세부 구성
Basic
말 그대로 기초 동작, 제일 먼저 하는 단계다. 워밍업 및 스트레칭, 스쿼트, 팔, 다리 운동, 근력운동, 밴드를 활용한 운동, 복싱과 태권도, 복근운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초 체력이 없는 상태에서 기본적인 운동이라고 호기롭게 접근하면 다음 날 힘들어진다. 스쿼트를 활용한 운동이 많기 때문에 다리에 자극이 많아 운동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영상이 시작되고 얼마 안 가 지친 본인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 다리 한쪽 들고 중심을 잡는 동작에서도 휘청거리며 중심을 못 잡는 경우가 있는데 능숙해지고 코어에 조금씩 힘이 생기면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Ultimate
구성된 영상 중 최고봉. Basic과 비슷한 시간 운동하지만, 더 빠르고 강하게 온몸을 자극하며 운동한다. 스트레칭보다는 근육 자극에 집중한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들이 있지만 반복하면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Basic과 다른 운동에 익숙해졌다면 따라 할 정도는 된다. Basic은 조금 설렁설렁하는 느낌이 있지만, Ultimate는 쉴 틈을 많이 주지 않는다. 끝나고 나면 온몸이 떨리고 땀이 나는 게 당연하다. 2인 1개 조로 복근 운동을 하는 부분에서 빌리 아저씨는 잠깐 하다가 하지 않고 같은 조가 된 사람만 시킨다. (얄미움)
AB
복근 위주 운동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스쿼트 자세로 복부를 좌우로 흔들며 시작해 옆구리, 하복부 등 쉴 새 없이 복부를 자극한다. 다른 영상에 비해 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지만, 복근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면 많이 피곤하다. 효과가 있을지 의문인 동작들도 있지만 힘든 건 마찬가지다. 다리를 굽힌 상태에서 복부를 자극하기 때문에 복부보다 하체가 더 자극되는 경우도 있다. 이 운동은 변비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도 추천할만한데 복부를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에 다음날 쾌변을 경험할 수 있다.
Cardio
빌리의 부트 캠프에서 가장 짧은 운동 코스며 유산소 운동에 집중한다. 짧은 시간 빠르고 간결하게 Basic 운동을 하게 조정된 느낌이다. 버피테스트가 등장한다. 다른 영상들은 스튜디오 촬영인데 이 영상은 야외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내가 잘못 선택했나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고민 말고 영상을 따라 하면 된다. 영상 속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해외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한다.
운동 일정
운동 일정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일주일 과정, 한 달 과정이 있다.
<일주일 일정>
Basic – Basic – Ultimate – Ultimate – AB – AB – Cardio
<한 달 일정>
1주 : Basic - 휴식 - Basic - 휴식 - Basic - 휴식 - Cardio
2주 : 휴식 - Cardio - Basic - 휴식 - Cardio - Basic - 휴식
3주 : AB - 휴식 - Cardio - AB - 휴식 - Cardio - AB
4주 : 휴식 - Ultimate - AB - 휴식 - Ultimate - Cardio – Ultimate
체력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일주일 과정을 해도 괜찮지만, 일주일 과정이 버겁거나 꾸준히 오래 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한 달 과정이 낫다. 그렇다고 1달 과정을 우습게 보지 마라. 휴식 날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운동 초기에 일어나는 ‘빌리 몸살’ 때문이다.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 부트 캠프 동작을 따라 하면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며칠간 끙끙대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를 빌리 몸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몸살을 겪고 나면 조금 운동이 쉬워진다. 몸살 기운이 생겨도 포기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괴물 소굴 속 더 악한 괴물 빌리
영상을 그대로 따라 하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해맑을까? 행색은 초보자, 저질 체력으로 보이지만 끝까지 멈추지 않고 해내는 모습을 보며 초보자의 탈을 쓴 숙련자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카메라를 사랑한다. 카메라를 의식해 자기를 찍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무표정이나 힘든 얼굴에서 웃는 얼굴로 바뀐다.
몇몇은 가끔 힘들어하기도 하고 동작을 대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못한 나를 보며 자존감이 무너진다. Ultimate의 경우 다 따라 하는 체력이 생겨도 나중에 복근 운동을 하면 지쳐서 영상 속 괴물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마치 유격 훈련에서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자세를 또 시키거나 마지막 구호를 외쳐 같은 자세를 2배로 더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빌리 아저씨는 더 괴물이다. 악질 괴물.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갈구면서 자기는 안 한다. 아저씨는 운동 내내 입을 턴다. 남들 열심히 할 때 입을 턴다. 하더라도 잠깐 하고 시청자들에게 삿대질하며 쉰다. 근데 땀은 더 흘린다. 이 아저씨는 “One more time”이나 “Burn your fat”이라고 외치며 한 번 더 하기를 강요한다. 잘 따라 하다가 지칠 때 그 소리를 들으면 욕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자기는 안 한다. 그에게서 힘든 일은 죄다 내게 시키고 자기는 쉬는 악덕 상사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운동 중간마다 밴드를 활용하는 운동에서 아저씨의 상술도 느껴진다. 밴드가 없어 초라한 내게 사재기를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속지 말자. 물론 밴드를 사서 하는 것도 좋지만 집에 아령이 있다면 아령을 활용해보자. 아니면 물병에 물을 담고 해도 좋다. 그것마저도 귀찮다면 그냥 동작에 집중하면 된다. 마지막에 힘을 주면 조금씩 자극이 온다.
그가 가장 미워 보일 때 중 하나는 Ultimate에서 마지막 기마 자세할 때다. 영상 속 인물들과 시청자에게 기마자세를 요구하고 일장 연설을 펼친다. 격한 운동으로 지친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한다. 빌리 아저씨의 패기에 나도 절로 하게 된다. 끊임없는 관심에 사람들의 자세는 흐트러진다. 끝났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람들이 하나둘 있다.
기약 없는 퇴소 날짜
캠프에 입소한 지 4개월이 됐다. 아주 큰 변화는 없다. 다이어트라는 게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해야 하는데 식사 종류와 양의 조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눈에 보이는 작은 변화가 있다면 첫째로 전체적으로 근력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팔굽혀펴기 동작이 한 번은 들어가기 때문에 처음은 버거워도 익숙해짐에 따라 거뜬히 할 수 있는 양도 늘어났다. 둘째로 체형 변화다. 허벅지와 배를 많이 자극해서 그런지 살들이 조금은 빠진 느낌이다. 처진 엉덩이가 올라가는 효과도 있었다. 반복적인 근육 운동에 잔 근육들이 발달하는 모습도 보인다.
일정을 지키다 보면 어느새 꾸준히 하는 나를 보게 된다. 게다가 이 캠프는 오글거리는 감동이 있다. 보통 한 동작을 힘들게 끝내면 욕이 나오거나 한숨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사람들은 챔피언 결정전에서 이긴 것처럼 환호하고 하이파이브하며 행복해한다. 시련을 이겨내고 한 단계 발전한 인물들의 청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것 같은데 은근 중독성 있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다 같이 모여 손에 손잡고 외치는 승리의 구호 “Victory”. 빌리 아저씨는 이때 가장 힘이 넘친다. 옆 사람의 손을 잡고 강제로 팔을 들어 올려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노출함으로 수치를 제공한다. 들어 올려진 사람들의 팔에서 약간의 저항 섞인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아마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방방 뛰며 좋아하지만 말이다. 이런 깨알 같은 재미 때문에 내 퇴소 날짜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당신에게 보내는 입소 영장
밖에서 운동하기보다 홈 트레이닝을 하고 싶은가? 혼자 운동하고 싶은데 여러 사람과 운동하고 싶은 기분을 갖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캠프의 입소를 권한다. 좋은 운동 효과, 빵빵 터지는 재미. 이 모든 것을 갖춘 빌리의 부트 캠프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체력단련, 다이어트 교재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건강으로 윤택해진 삶을 살아보자. Vi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