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눈으로 즐기는 중꺾마의 경기
재미있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몇 번을 다시 듣고 봐도 재미있다. 너무 자주 접해서 이야기를 다 꿰뚫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게 이야기가 주는 힘인 것 같다. 요즘은 해리포터와 바통 터치했다지만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찾아오는 케빈과 <나 홀로 집에>가 그랬듯이.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작품이 있겠지만 만화 <슬램덩크>는 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콘텐츠를 통틀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만화책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까지 모두 섭렵했다. TV 애니메이션은 원작과 다른 전개로 결말이 나서 전국 대회에 간 북산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이번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제목으로 극장에 개봉했다.
극장판 제작 소식을 접했을 때 기대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마음도 있었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할 텐데 영화로까지 이렇게 만들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슬램덩크>는 후속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완전판, 완전판 프리미엄, 신장판 등 같은 내용을 표지와 종이만 다르게 계속 나오고 있다. 이 정도면 사골을 우려도 국물이 안 나올 것이다. 강백호와 서태웅은 여전히 고등학생이지만 언제 고등학생이 되나 생각했던 유치원생인 나는 30대가 되었다.
내가 만드는 것도 아닌데도 걱정과 우려, 불평으로 영화를 봤는데 참 재미있게 봤다. <슬램덩크>를 즐겼을 많은 소년, 소녀가 어른이 되어 부모로서 그 당시 본인 나이대의 자식들을 이끌고 극장을 찾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만화책의 명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즐겼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자식들보다 더 ‘어른’이 아닌 ‘어른이’였던 것 같다.
산왕공고와 경기를 다룬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만화책과 다른 재미가 있다. 다양한 눈으로 영화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눈이다.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강백호라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이다. 작가인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한 인터뷰에서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이유로 다른 인물에 비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농구 경기를 지휘하는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이고 북산고의 포인트 가드는 송태섭이다. 농구 경기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보는 이는 경기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경기 자체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송태섭이 이끌어 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만화책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던 송태섭의 이야기가 경기 중간마다 나온다.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를 다룬 작가의 단편 만화인 <피어스>가 있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피어스>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또 경기 중 성장하는 송태섭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경기만 오롯이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쉬울 수 있지만, 여운이 남는 이야기라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두 번째는 관중의 눈이다. 보는 이가 마치 관중이 된 것처럼 이야기를 보게 한다. 컷으로 나뉜 만화책뿐만 아니라 만화책의 한 컷, 한 컷을 끊어지는 느낌으로 담은 TV 애니메이션은 농구 경기가 주 내용임에도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이와 다르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구도 자체가 경기장에 집중되어 있어 정말 경기장에서 경기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여러 컷을 동시에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특정 장면이 경기장의 어느 위치에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원작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더라도 경기장에 있는 것 같은 현장감과 속도감 때문에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마지막은 독자의 눈이다. 원작을 본 독자라면 원작의 내용을 톺아가면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실제 경기를 보는 것 같은 빠른 전개 때문에 놓치는 장면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은 베테랑 여행가가 지도를 하도 많이 봐서 길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언제 무슨 장면이 나올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놓쳐도 상상과 추억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 또 새로운 것이 나오더라도 어색함이 아닌 신기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비교하면서 볼 수 있는 독자의 눈 덕분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단지 추억 팔이라고만 할 수 없는 꽤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렇다고 아쉬운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경기를 만들려 했다는 것은 잘 알지만, 만화책에서 봤던 것처럼 클로즈업으로 부각했다면 더 극적으로 보일 수 있었을 장면, 작가 특유의 코믹한 내용이 있는 장면을 더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빼기엔 아쉬운 내용이 너무 많아서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담아 흐름을 깨는 장면이나 경기 중 일부로 스쳐 지나가듯 보여 준 몇몇 장면은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집중해서 보면 각 캐릭터의 성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어 좋기도 했다. 특히 강백호의 모습이 그랬다. 보고 싶은 명장면이 나오지 않은 것도 아쉬웠다. 모두 다 분량 조절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다른 아쉬움은 산왕공고의 강력함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기 내용 면에서 북산고를 패배 직전으로 끌고 가는 것만으로는 만화책만큼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우성, 신현철, 이명헌 등 각 포지션 최강자로서 모습이 더 잘 나타났다면 좋았겠지만 산왕공고 선수들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보다는 북산고 그중에서도 송태섭을 부각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일 거라는 생각이다.
재미와 감동 모두 얽힌 이 이야기는 금방 시간이 흐르게 만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내용을 몰라도 재미있고, 알아도 재미있는 이야기이자 추억 여행이었다. 또 주는 메시지도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2022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울림이 있었던 단어인 ‘중꺾마’가 떠올랐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결과가 어떻든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되고 열광한다. 최근에야 유행하는 단어 같지만, 이 중꺾마는 2~30년 전에도 아니 인류가 사는 동안 말만 다를 뿐 전 세계적으로 계속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벤치 멤버가 약해 전체 40분의 경기 시간을 거의 다 뛰는 북산의 스타팅 멤버들. (덕분에 샛길로 샜다가 돌아온 중학 MVP 출신 불꽃 남자 정대만은 대부분의 경기마다 파김치가 된다) 모두 다 고생 중 개고생이지만 가장 으뜸은 송태섭이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경기마다 상양고의 김수겸, 해남고의 이정환, 산왕공고의 이명헌 등 정상급으로 묘사된 포인트 가드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잘 싸웠지만, 결코 이들을 이겼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송태섭은 고전했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 건지 극장판에서 주인공을 맡게 되었으니 송태섭의 입장에선 큰 보상이자 감개무량할 일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