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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Jun 19. 2023

생일의 변화

또 한 살 먹었다. 거울에 비친 어느새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면 그리 달갑지 않다. 뭐한 게 있다고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늘어진 팔자주름, 삐져나온 흰 머리카락. 겉 포장은 볼품없는데 속은 아직 철들지 않은 어린이다. 이 나이쯤 되면 나의 미래, 내 가정의 미래를 고민하는 건설적인 인간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이전과 다른 것 없이 뭐 재미있는 일 없는지 고민하고 있으니. 거울이 내 정신상태까지 비추며 비웃는 것 같아 민망하다.


어릴 땐 생일이 기다려졌다. 오래 쉬는 명절보다도 더 기대됐다. 언제든 가족의 사랑을 받았지만, 특히 그날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더욱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기보다 태어났다며 되레 축하받는 것을 마땅히 여기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의 협업이 이날만큼은 허용된 것처럼 살았다. 평소에 가지고 싶어 졸라도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것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내가 특별해지는 기분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뿐일까? 한 살 더 먹으면 부모님처럼 되고 싶은 어른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기분이 들었다. 빨리 커서 지금 못하는 것을 하리라. 심지어 돈도 벌고 싶었다. 그게 그리 피곤한 일인 줄 알았다면 안 바랐을 텐데. 


나이를 먹으니, 생일은 그냥 1년 365일 중 하루일 뿐인 날이 되었다. 큰 감흥도, 기대되는 것도 없이 무덤덤하다. 바라는 것도 없으니, 선물이 있든 없든 시큰둥하다. 생일에 만나는 햇살이 왠지 더 눈부시고 따스하게 느껴졌던 것이 기분 탓이었음을 깨달은 지 오래다. 피곤함에 절은 몸을 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다. 이후 평일이라면 길게 생각할 겨를 없이 출근 준비에 바쁘고 주말이라면 쉴 생각에 바쁘다. 


생일이 다가오는지, 오늘이 생일이었는지도 모르다가 여기저기 가입된 곳에서 생일 축하 메일, 문자가 올 때 생일이 왔음을 실감한다. 심지어 간 지 10년 지난 미용실에서도 생일 축하한다고 문자가 오고 있다. 딱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내 개인정보가 그렇게 값쌀 줄이야. 그래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할인 쿠폰이라도 주는 그들을 보며 아예 모르는지, 잊어버린 건지, 아는데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아무 말 없는 주변인들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덕분에 인간관계를 잘못한 것은 아닌지 자기반성의 시간을 해마다 가졌다.


예전부터 생일 시기에 안 좋은 일들이 많아 생일을 제대로 누려본 기억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내 생일에 집착이 강했고 남의 생일도 꼼꼼히 챙기려고 했다. 온전히 퍼주더라도 만족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게 언제 일이냐는 듯 지내고 있다.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데 나도 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비슷한 일로 몇 번 데어버린 후 내가 주었으면 받거나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는 철저한 ‘Give and Take’로 사고방식이 바뀌어버렸다. 그렇기에 가끔 섭섭함을 느끼는 나를 보면 참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조금 처량하고 하루뿐인 생일을 이리 보내기에는 아쉬워서 스스로 생일을 챙기기도 했다. 평소에 ‘필요하다, 갖고 싶다’ 생각했던 물건을 사는 것으로 생일을 자축했다. 이제 버젓이 직장 생활을 통한 경제적 수입이 있어 엄마의 눈총이 덜 따가워졌다. 쓸데없는 물건을 사도 괜찮은, 말 그대로 ‘내돈내산’을 영유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생일에 갖고 싶은 것을 말하거나 바라기만 했다면 이제는 그냥 살 수 있어 기분 좋지만, 기대하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심장 쫄깃함이 사라져서 아쉽기도 하다.


큰맘 먹고 산 것은 러닝화였다.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체력도 좋지 않지만. 나는 달린 뒤 숨 가쁨을 좋아한다. 미친 듯이 오래, 숨이 끊어질 것처럼 달려서 멈췄을 때 숨을 내뱉으며 땀이 이마와 등줄기에 뜨겁게 흐르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다른 때는 이 느낌이 허세처럼 느껴지지만, 그 순간만큼은 허세가 허용된다) 마치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날도 생일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 ‘사점(死點)’의 순간을 벗어나는 순간 운동하는 중에 고통이 줄어들고 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 상태인 ‘세컨드 윈드’가 일어난다는데. 개뿔이다. 그런 거 없다. 그냥 그 기분 느끼고 집에 가서 씻어야지. 더 달리면 다음 날 몸살 난다.


생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서 변한 것이 있다면 조금씩 주변을 바라보는 눈과 생각하는 머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만 생각하기 바빴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르몬의 작용에 따라 감성적으로 바뀐 것인지, 못되고 덜된 인간이 미약하게나마 나아진 건지 생일에 나보다 남을 생각하게 됐다. 이 불효막심한 놈은 여태 어머니의 사랑을 입에 달기만 했지, 머릿속에서 상기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나 삶을 경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 모자람과 욕심이 많은 탓인지 실패에 관대하지 않고 무례하기만 하고 성공과 성취만 뒤쫓고 있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솔직히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내가 빛을 보게 하겠다며 고생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감사하고 가슴 아프다.


모래시계 한쪽 공간의 모래가 점점 줄어들어 다른 한쪽이 가득 채워지는 것처럼 누군가는 가득 차는 동안 누군가는 생기가 점점 사라진다. 엄마의 등이 점점 굽고 피부가 푸석해지는 동안 나는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엄마의 기를 빨아 먹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내가 더 커질 날은 없겠지만 계속 생일을 맞이하는 동안 엄마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닐지, 이를 맞닥뜨려야 할 때 내가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일이지만 누구나 한번은 겪고 따라야 할 순리이기에 완전히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가지고 있다.


앞으로 생일을 맞아 더 나이를 먹으면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이 또한 막연한 상상이지만 후세에 대해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혀를 끌끌 차며 다음 세대를 내리깎는 그런 생각 말고 가정을 이뤄 가족에 대한 기대를 중심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남보다 내가 더 잘되었으면 하는 내가 나의 자식들이 나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며 늘 기도하고 응원할 수 있을까. 부모의 입장을 겪지 못해 아직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날이 내게 찾아온다면 엄마가 나를 바라보고 헌신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를 따르기 위해 애쓰는 나를 발견하지 않을까. 또 이를 뿌듯해하지 않을까. 명확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느껴보지 못한 뭉클함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이유로 생일을 의미 없게만 느끼는 날이 더는 늘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생일을 맞이한다면 그럴 때마다 쌀 한 톨만큼의 크기라도 그보다 더 작은 티끌 하나 정도 크기이더라도 변화가 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몸도 마음도 건강한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이 마음가짐이 작심삼일로 끝나지 않기를. 그래서 훗날, 이 글을 읽었을 때 화려한 조명에 버금가는 창피함이 나를 감싸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벌써 겁이 나긴 하지만 매년 만날 생일마다 생일에 대해, 나에 대해 의미를 조금이나마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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