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요 - 철도 인생
역에도 봄이 왔다. 봄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대청소다. 역을 완전히 갈아엎을 수준으로 청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봄을 맞이한다는 취지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투자한다는 점에서 대(大)자를 붙일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방은 주기적으로 정리하지만, 역무실을 청소하는 것은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다. 역에서 일하시는 정리원께서 매일 청소를 해주시기에 청소할 생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청소하는 이유는 정리원분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여기 좀 청소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소속감 때문에 하는 일은 절대 아니다. 케케묵은 먼지 때문에 내가 아프기 싫어서, 미관상 보기 좋지 않아서 하는 것이다.
우선 역무실에 있는 에어컨을 닦았다. 필터도 깨끗하게 씻었다. 곧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사용할 텐데 조금이라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또 정리원 분들의 손이 닿지 않은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쓸었다. 보통 눈에 보이는 바닥만 닦아주시는데 직원들 책상 밑까지 깊숙이 들어가 엉킨 전기 코드를 들추며 빗자루로 쓸었다. 운동장에서 뒹군 것도 아닌데 각종 모래와 돌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시들어 가는 화분에 물을 줬다. 역무실 한곳에 자리 잡아 눈에 띄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화분이었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뜨거운 불 프라이팬에 볶아놓은 풀죽은 시금치처럼 힘을 잃은 화초를 보며 제 끼니는 제때 잘 챙기는 내가 미안했다.
이렇게 일하면서 든 생각은 참 얄팍하고 속 좁은 생각이었다. 그것은 바로 ‘왜 아무도 하지 않고 나만 하느냐’였다. 하다 보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금방 나왔다. 내 눈에 보였고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내 노고에 대한 위로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예전 같으면 비난의 연속으로 살았을 텐데 조금은 사고가 유연해진 것인지 무조건 남을 욕하지 않은 것에 나도 놀랐다. ‘누군가 하겠지’라고 방관하며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들은 보지 못한 것이 내 눈에 띄었을 수도 있다. 민감도, 주변 시야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조금 더 예민한 내가 봤을 뿐이고 봤기 때문에 남이 하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나섰다. 그게 옳은 일이며 속 편한 것이라고 나를 달랬다.
그렇게 먼저 나서서 일했을 때 개운함과 보람만 남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허무함도 같이 찾아온다. 이 일에는 추가되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 외에 자발적인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돕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 이와 반대로 내가 먼저 나섰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돕는다면 도움을 받아 일을 빠르고 쉽게 해결할 수 있고 함께 일한다는 생각에 더 신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 모든 사람이 모른 척하며 나서지 않고 돕지도 않으니, 재미는커녕 사서 개고생한다는 생각이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벌여놓은 일이 있기에 꾸역꾸역 다 해냈을 때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릴 수밖에 없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던 화초가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계절과 온도와 다르게 꽁꽁 얼어붙은 내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풀잎이 하늘을 향해 손 뻗는 것을 보며 내가 결코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사람도 몰라주는 것을 식물이 알아주니 할 맛이 나더라.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게 이런 걸까. 화초의 진짜 심정은 잘 모르겠지만, 물을 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녀석들 모습 봐서라도 꾸준히 해야겠다는 다짐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