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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Sep 04. 2023

융통성 없는 녀석

노동요 - 철도 인생

‘FM’이라는 말을 보거나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개 딱딱함일 것이다. FM은 Field Manual의 약자로 군대에서 사용하는 지침서를 뜻하는 용어다. 관련된 일이나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나와 있는 교본 같은 것이다. 이대로 따라 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지만, 정해진 순서와 규칙대로 행동해야 하기에 꽉 막혀서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FM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좋게 말하면 규칙적이고 말 잘 듣는 사람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딱딱하고 타협 없고 고지식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들에게 많은 이가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충고와 조언한다.


융통성. 사회 속에서는 ‘유도리’라는 일본 잔재어로도 불리는 이 기질은 어쩌면 업무할 때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매뉴얼은 온갖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직접 맞이하는 상황은 매뉴얼에서 예측하고 가정한 상황과 미세하게 다를 때가 많다. A, B, C, D 등의 상황이 있지만 A-1, A-2, A-3 같은 하나의 큰 상황에 미세하게 갈라지는 상황에 대한 대처법은 안 나와 있는 때가 많다. 맞이하는 상황도 미세하게 다를뿐더러 그 상황에서 맞이하는 사람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뻑뻑해진 바퀴에 기름칠해 부드럽게 만들고 꺾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막대에 유연성을 더해 꺾어도 휘어지게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융통성이다. 융통성을 발휘하면 하나밖에 없는 정답이 여러 개가 되기도 하고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맞이해야 하는 답을 더 빠르게 찾을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융통성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정해놓은 규정과 규칙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일이 잘 풀리면 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으면 원래 규정과 규칙을 부정하게 되기도 한다. 원래 규정이 개정될 때도 있다. 하지만 개정이 되기까지 그 과정이 길고 험하다. 개정될 때도 있지만 융통성을 발휘한 방법의 사용을 자제, 금지 시키는 경우로 결론 나는 때도 많다.


융통성을 언제 발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물론 위에서는 최대한 규정을 지키라고 말한다.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기 힘들 때가 참 많다. 지키려고 하다가 더 욕먹기도 한다. 언젠가 한 여자 고객이 역의 계단에서 펑펑 울다가 지쳐서 누워있던 적이 있었다. 역무실에 여자가 쓰러졌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여직원과 함께 갔다. 현장에서 본 여자의 모습은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호흡에도 문제가 있을 정도로 울어 어딘가 몸이 안 좋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당연히 119 신고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내게 마사지하라고 해서 옆에 있던 여직원에게 마사지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안 하고 남 시킨다고 욕을 먹었다. 당연히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마사지에 선뜻 나설 수 없었다. 무슨 의도든 간에 남성이 여성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폐소생술을 했더니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일이 나올 정도로 언론, 여론 등에서도 이성의 신체 접촉 때문에 말이 많던 시기였기에 이성의 신체 접촉을 피하라는 회사의 지시가 있었다. 여직원이 없었다면 했을지 몰라도 옆에 여직원이 있는데 내가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그 여자 고객은 진정하더니 창피했는지 얼굴을 가리며 도망가 버렸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 119 대원들과 함께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지만, 거친 몸부림으로 뿌리치고 거부했다. 자신 때문에 소동이 일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받지도 못했다. (사실 사과를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얼마나 가고 싶었는지 자기 핸드폰도 안 가져갈 정도였다. 그래서 도망가는 여자를 끝까지 쫓아 핸드폰을 건넸다.


일하는 직원에게는 다 사정이 있다. 누군가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한다. 요즘 인재는 그런 사람이라고도 말하는 자기계발서도 많다. 여론과 언론, 회사 규정과 지시. 사회적 분위기, 따지자니 따질 게 많고 안 따지자니 막 나가는 사람이 된다. 융통성은 번뜩이는 최고의 기지가 될 수도 있지만 무법이 될 수도 있다. 내 직업 같은 경우에는 융통성을 발휘하면 나쁜 놈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른 역에서는 해주는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냥 우기려고 하는 논리일 수도 있다. 다른 역에서 해줬다는 것이 서울교통공사, 인천교통공사 등 시에서 운영하는 교통공사의 규정과 한국철도공사의 규정이 달라서 도와준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도와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음에도 더 실랑이하기 싫어서 도와주기도 한다. 융통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지만 옳은 행위가 아니다. 사람마다 발휘하는 융통성의 크기와 범위는 다 다르다. 융통성을 어떻게 발휘하라는 어느 정도 발휘하라는 매뉴얼은 당연히 없다. 어떤 상황에서 융통성을 발휘해 도와주면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준다며 따진다. 그냥 자기 마음에 들게 도와주면 좋은 사람,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 된다. 지시대로 하면 한다고 나쁜 놈, 지시대로 안 하면 또 안 한다고 나쁜 놈이 되는, 뭘 해도 나쁜 놈이 되는 것이 우리다. 


자기 돈으로 일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지 공무원이나 공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돈 축내고 돈을 훔치는 사람들로 인식을 가지는 때가 많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은 어떻게 일하더라도 항상 나쁜 놈이다. 일 안 하는 게 아닌데. 단지 정부의 지시와 회사 규정을 따랐을 뿐인 건데. 국민의 혈세로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자기들끼리 성과급 파티를 하는 철밥통. 자주 듣는 말이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힘든 다른 노동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일도 나름 고충이 많은 일이다. 모든 직장인의 비슷하지 않을까. 내 고충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상식과 시선을 정답이라고, 융통성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현직자에게 해법을 제시하거나 비난하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듣고 보면 혜안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듣는 상대 또한 한 번쯤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유로운 개인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회사원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운 규정에 대해서 바꾸자고 회사에 건의하기도 한다. 회사가 들어주면 규정이 개정되지만, 여러 이유로 거절당하면 그냥 거절당한 생각에 그치게 된다. 그런데 회사 규정을 따르려 하면 가만히 있다면서 뭐라고 한다. 정말 가만히 있었던 사람도 몇 있다. 그런 게으른 사람이 아닌 한 뭐라도 해보려고 했던 사람이 많다. 알고 보면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도 융통성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연해 보이지만 규정 안 따르는 것이 되어버리는 융통성, 유용하면서도 사람 힘들게 하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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