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아파도 신선했던 영화
어릴 적 집에 배달 온 신문에는 지면 광고에 영화 포스터와 그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목록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처럼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대부분인 요즘과 달리 20여 년 전에는 서로 다른 영화관이 이곳저곳에 있었다. 나는 어떤 영화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며 영화와 영화관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기껏 영화를 봐야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보거나 명절에 특선 영화를 보는 게 다였다.
그런 나에게 친누나가 영화를 보여줬다. 영화관이라는 곳에 간다는 것은 상당히 설레는 일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하나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더 신나는 것은 누나가 영화 선택권을 내게 준 것이다. 어떤 영화가 상영 중인지 신문을 보며 알고 있었던 터라 세간의 평은 몰라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을 재빨리 고를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화산고>였다.
배우 장혁은 부끄러워할지도 모르는 그의 ‘TJ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가수 활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금발의 머리와 화려한 의상, 다른 가수와 다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랩. 하지만 내게는 우스꽝스럽게 다가왔기보다 멋졌다. 반항아 같은 이미지가 멋있게 다가올 나이였다. 그런 장혁의 영화가 나왔다? 당연히 보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TV 광고에서 나오는 화려한 액션 신이 있는 예고편도 눈길을 끌었다. 애관 극장인지, 인형 극장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인천의 한 극장에서 큰 기대와 함께 <화산고>를 만날 수 있었다.
화산고에 전학한 김경수(장혁)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꿈꾸는 주체하지 못할 공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무림 고수로 넘쳐나는 화산고에 전학생 경수는 새로운 경쟁자이자 요주의 대상이다. 경수는 학교 내 무림 비서 ‘사비망록’을 둘러싼 암투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린다.
영화는 재미있다고 말하기엔 조금 아쉬운 영화였다. 영화에 기대한 것이 있지만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영화는 이를 처음부터 화끈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마치 기선제압을 위한 위협용으로 조금만 보여줄 뿐이었다. 자기 능력을 가두고 감춰 내적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 영화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답답한 느낌이 많았다. 액션의 화려함을 주려고 했는지 일반인은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무림 고수들의 내공을 표현하려고 한 건지 카메라를 흔들며 인물들의 행동을 느린 동작으로 보여주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눈이 피곤했다.
주인공의 답답한 행보가 주 이야기가 되다 보니 다른 매력 있고 개성 강한 인물들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이들의 강함, 무공의 특징보다 개그 신에 활용되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장량 역의 김수로를 제외하면 눈에 띄는 캐릭터가 몇 없었다. 심지어 일인자라는 송학림(권상우)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한때 시대를 풍미한 온라인 게임 <포트리스 2>와 비슷한 게임 방식으로 이 영화를 게임화한 온라인 게임이 나왔는데 캐릭터마다 속성과 기술이 달라 오히려 이 게임이 인물들의 개성을 잘 살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안정적인 성공 공식만 따르려 하거나 화려하고 멋들어지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영화의 홍수와 다르게 이것저것 시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 덕분에 오늘날 한국 영화가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화산고>는 괜찮은 영화다.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가끔 방송에 나와 이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액션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태반이다. 와이어 액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액션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보다 얼마나 고생했을지가 먼저 떠오른다. 지금 나오는 영화 액션만 보면 <화산고> 같은 액션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요즘 영화와 비교했을 때 어떤 게 낫다고는 섣불리 말하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왜 지금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을까’다. 이 질문은 액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 이야기, 촬영 구도나 배경 디자인 등도 요즘 천편일률로 나오는 영화와 다르게 눈에 띈다. 이야기 구성, CG 등 모든 것이 발전했지만 이때처럼 새롭게 뭔가 해보려는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요즘 영화를 보면 오히려 <화산고>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화산고>는 스타 배우들의 총집합 영화였다. 유명한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망한 배우들은 시대를 주름잡는 배우들이 되었다. 이들이 다시 모여 영화를 만든다면 출연료 때문에 제작비가 참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니 말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뿐더러 큰 성공을 거둔 영화가 아니라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후속작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화산고>처럼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영화판이 망하겠다는 말이 자꾸 나오는데, 수작의 탈을 쓰려고 하는 망작을 만들기보다 <화산고>처럼 망작의 누명을 써도 알고 보면 수작인 영화를 만들어야 2000년대와 같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다시 가져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