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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Aug 07. 2023

별명이 없다

나는 별명이 없다. 남이 나를 부르는 다른 호칭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이름 대신 쌍욕으로 나를 부른다든지)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가 나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른 적이 별로 없었다. 


대신 나는 남의 별명은 많이 지었다. 별명 짓는 법은 다양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초등학교 다닐 때 성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끝말잇기 하듯 친구들의 별명이라고 지은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 씨면 ‘김밥’, ‘김말이’ 이런 식으로. 나도 처음 별명 지을 때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것은 어린이들의 누가 어휘력이 좋은지 확인하는 척도이기도 했다. 별것 아니지만 남이 모르는 단어를 활용하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나도 성으로는 몇 번 이름을 사용한 별명으로 불렸는데 조 씨라 ‘조개탕’ 정도는 몇 번 불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별명 짓는 기술이 더 발전하면 사람의 생김새로 별명을 짓거나 특정 상황에서 한 행동을 토대로 짓기도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한창 인기를 끌 때 구마적의 부하 중 하나였던 ‘평양박치기’라는 인물을 닮았던 친구는 그대로 평양박치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에게 손을 들라고 선생님이 말할 때 검지 손가락을 펴들던 친구는 ‘빈 라덴’이 되었다. (빈 라덴 별명의 일화는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손 드는 모습을 본 한 선생님이 이슬람교에서 그렇게 많이 한다며 그 친구에게 이슬람교냐고 물었고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지어졌다) 내가 지은 별명이 몇 개 호응을 얻으니 조금 더 참신한 별명을 짓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별명 짓는 것을 창의력의 척도로 여겼던 것 같다.


이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내게 별명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별명이 없다는 것은 내 나름의 콤플렉스였다. 특색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왜 없는지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다. 내게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내게 별명을 짓거나 별명으로 부르는 게 어려운 걸까? 스스럼없이 친구를 별명으로 부르는 것은 더 큰 우정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져 부러웠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는 게 아닌지, 그 거리감을 좁히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며 나란 사람에 대한 자신감이 줄기도 했다. 그래서 나 혼자서 내 별명을 지어 불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유행어를 만들고 싶은 개그맨이 아무리 특정 대사를 밀어도 호응을 얻지 못하면 유행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동의와 공감이 없는 별명은 쓸모가 없었다. 


고민 중 문득 누군가 내 별명을 지어, 그렇게 불렸더라도 내 마음에 안 드는 별명이라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나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 별명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 내가 어떤 호칭에 기분 나쁘게 느낀다면 타인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별명이라는 것은 시나브로 지어져 대개 남의 의사와 관계없이 불리는 때가 많다. 또 완강히 거부하지 않는 한 별명이 지어지면 유성펜으로 쓴 글씨처럼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남의 별명을 짓는 소소한 취미도 점점 하지 않았다.


별명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별명이 없다는 것에 대한 작은 아쉬움이 남아 있다. 어쩌면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싶은 내 욕심이 별명에 대한 집착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별명은 인물의 특징이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특정 단어로 불리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표현으로 불리기보다 긍정적으로 불리고 싶어 내 행동에 스스로 주의를 주곤 한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며 항상 뒤늦게 깨닫곤 한다) 별명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내가 인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기억해 주고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 좋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언제나 꺼지지 않는 생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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