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BTI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성격 유형 검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 유형을 딱 16개로만 정해놓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또 이를 맹신하며 ‘네가 XXXX 유형의 성격이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야’ 같은 식의 해석은 사람을 틀에 가둬놓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얼마나 감정이 풍부한 존재인가. 어떤 때는 T, 어떤 때는 F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고 이게 정해진 확률이나 일정한 수치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MBTI 검사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15년 전 우연히 학교 상담 센터에서 MBTI 검사를 했고, 내 성격 분석 결과는 ‘ISTJ’였다. 이 성격을 대충 요약하자면 내성적이고 계획적이고 성실한 사람. T의 성격이 짙기에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람. 그래서 공감을 잘 못하는 사람. 요새 어떤 상황이나 문제에 공감 못 하고 분석하거나 해결하려 드는 사람에게 잘 묻는 말이 밈처럼 있다. “너 T야?” 그래. 나 T다. 그렇다고 아예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도 발끈해서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한 영화를 볼 때 관객마다 몰입하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영화 자체의 분위기에, 누군가는 캐릭터에, 누군가는 이야기의 흐름에. 이게 내 성격 탓인지, 영화를 보는 스타일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이야기 흐름의 예상과 영화 분석에 집중하게 된다. 평론가 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용은 각각 다를지라도 콘텐츠의 처음과 끝이 훤히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껏 살면서 본 콘텐츠가 계속 쌓이고 쌓이면서 생긴 경험 때문인 것 같다. MBTI로 분석했을 때는 T의 성향이 강한 탓도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본 영화 <달짝지근해: 7510>는 영화를 선택하게 할 만한 요소는 많았다. ‘착한 영화’,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 등 주변의 소소한 칭찬, 내가 좋아하는 배우 유해진이 나온다는 것 등. 하지만 영화를 본 후에는 여운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해야 하는 제과 연구원 차치호(유해진)는 남들이 보기에 괴짜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치호는 철없이 사는 형 석호(차인포)의 대출 문제를 해결하러 찾아간 대출 회사 콜센터에서 긍정적으로 사는 이일영(김희선)을 만나게 된다. 그 만남 이후로 인생의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된다.
T 인간이 보기에 이 영화는 참 정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볍게 웃기려고 작정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약간의 숨겨진 이야기와 신파 같은 장치는 영화의 극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 영화는 이야기와 전체 내용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각본의 문제인지 연출의 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이야기는 흘러가나 개연성이 부족했고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예로 들자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전체 그림을 구상해서 세밀한 내용을 하나씩 그려 넣는 게 아니라 일단 그림의 일부, 그것도 구석에 있는 일부를 그려 넣고 그림을 인상적으로 느끼게 하려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 추가 그림을 그려 억지로 엮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억지스러운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유해진의 역할이었다. 영화 속 유해진의 연기가 아쉬운 것은 없었다. 과장된 것 없이 담백하게 주어진 설정에 따라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유해진이 코믹한 연기를 자주 했기 때문에 편견이 있었던 건지 이 영화가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첫 로맨스 도전이라는 홍보 문구로 관객에게 어필했을 때부터 사랑 이야기가 있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기 하나 없고 멋짐이 넘치는 이야기는 아닐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초반에 나타나는 치호의 독특함, 또 중후반에 왜 이 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을 보며 심술이 났다.
‘왜 유해진은 정우성 같은 사람처럼 처음부터 멋있는 역할로 설정되면 안 되는 건가. 왜 특별한 장치가 필요한 건가.’ 외모 때문에? 영화의 재미와 반전을 위해서? 밋밋할 수도 있겠지만 극도로 평범한 사람의 극도로 평범한 사랑 이야기였더라도 유해진이라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미있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가수 노을의 노래 중 <전부 너였다>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의 주연이 유해진이다. 로맨스 연기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런 진지한 연기도 잘하기에 사랑도 그런 사랑 연기를 언젠가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영화가 정말 재미없거나 볼거리가 없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소소한 코믹한 장면, 많은 특별 출연자들의 등장, 차인표, 김희선 같은 왕년의 스타들이 1인 주연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닌 뒷받침 역할을 한다는 것 등 눈길을 끄는 요소들도 많았다. 요새 보기 드문 착한 코미디 영화라는 것도 이 영화가 내세울 만한 특별함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 흐름과 말장난이라 찾아보니 각본을 쓴 사람이 이병헌 감독이었다. 영화 <드림>을 봤기때문인지 비슷한 구성과 대사 등 기시감에 “역시”라고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반가움 때문이었을까. 실망감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제목처럼 달짝지근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 단맛이 천연의 단맛이 아닌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단맛이었다.
T 인간이 봤을 때 주인공 치호의 MBTI는 ISTJ일 것 같다. 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감정적이기보다 논리적이며 계획적인 인간. 하지만 일영이라는 사람을 만나 조금씩 그 성격도 변화한다. 정반대의 성격을 보이는 일영이 처음에는 맞지 않다고 느끼다가 서로 융화한다. 처음에 다르다는 이유로 안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문 닫을 게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사람은 성장하고 달라진다. 영화 속 치호처럼. MBTI만 맹신하고 인간관계에 제약을 둔다면 소중한 인연을 얻을 기회도 날리게 되지 않을까. T 인간은 영화 크레디트를 보며 새로운 주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분석과 함께 극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