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를 만난 두니아
“아무리 창의적이더라도 이해를 시키지 못한다면 결과는 좋을 수 없다.” 모 PD가 한 강의에서 MBC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두니아~처음 만난 세계>에 관해 말한 평이었다. 시청률은 방송국이나 방송 프로그램에 참 중요한 수치이기 때문에 이 방송이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나는 당시 <두니아>를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실패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본을 최소화하고 실시간 투표와 인물들의 즉흥적인 행동에 따라 흐름이 이어지는 것,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공룡이 소재로 활용된다는 것 등 눈에 띄는 게 많았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섰기에 이 예능은 많은 이의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긴 어려웠다.
세상에서 규정한 실패를 맛봤기에 나는 박진경 PD가 이런 시도는 자제할 줄 알았다. 하지만 카카오로 이적 후 비슷한 예능 프로그램 <좀비버스>를 제작해 넷플릭스에서 방영한다는 말을 듣고 내심 반가웠다. <좀비버스>는 서울에 좀비 바이러스가 일어나면서 출연자들이 겪는 상황을 보여주는 생존 예능이다. 많은 출연자가 좀비가 돌아다니는 곳을 누비며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두니아> 좀비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나리오가 있지만 그 흐름을 출연자들의 행동에 맡기고 그들의 행동에 따라 조금씩 이야기의 변주를 주는 것이 <두니아>와 비슷하다. 방송을 보는 동안 이 생각이 들었다. ‘아, 역시 나는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하나 보다.’ 남들과 다른 것을 해서 좋다기보다 내 취향이 박진경 PD의 방송과 맞는 것 같다. 게임에서 볼 법한 내용과 요소를 프로그램에서 구현하려는 것이 마음에 든다.
<두니아>와 <좀비버스>의 다른 점 중 가장 큰 하나는 쉽게 알 수 있듯 소재다. <좀비버스>의 주 소재는 좀비다. 적어도 사람이 좀비 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CG로 만든 공룡을 상대하는 것보다 모든 출연자들이 더 실감 나게 행동할 수 있다. 출연자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연기자들의 좀비 연기와 분장 같은 시각적인 요소는 예능 프로그램임에도 영화만큼 눈에 띄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연기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몸을 사리는 것이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였다. 좀비 영화를 보면 살아남기 위해 가차 없이 좀비를 때린다. 이런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텐데. <좀비버스>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물론 과감하지 못한 액션에서 나오는 재미도 있었지만 말이다.
<좀비버스>의 아쉬운 점은 <두니아>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인 상황과 시나리오의 충돌이 가끔 눈에 띄었다는 것이었다. 예능이기 때문에 웃음도 잡아야 하고 이야기의 끝맺음을 위해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두니아처럼 아무것도 없는 야생 환경이 아닌 도시 중심으로 생존극을 펼쳤다는 것도 이를 위한 방안 중 하나였을 것 같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누군가 좀비에게 물려 좀비가 되지 않아야 하는 상황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좀비에게 물리는 상황이 발생했고 오랜 시간 생존하는 출연자가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이야기 전체의 설정과 몰입을 깨는 요소가 됐다. 여러 돌발 상황을 구상하고 이를 대비한 여러 대책을 미리 준비했더라면, 세부적인 설정에 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 조금은 덜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꼭 좀비라고 같은 좀비만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해결책으로 썼다면 어땠을까. <좀비버스> 세계만의 색다른 좀비 대처법을 구상하고 이를 진행하는 동안 풀어냈다면 시청자를 더 쉽게 이해시켰을 것 같다. 좀비 영화나 게임을 보면 좀비는 대부분 소리에 민감하고 물리면 물린 이가 좀비가 되는 설정은 거의 고정적이다. 우리가 아는 좀비에 대한 기본적인 설정을 활용하지 않고 비틀거나 출연자들이 우연히 치료 방법을 발견해 누군가를 치료한다든지, NPC 역할을 하는 다른 출연자들을 치료하거나 협력해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든지. 프로그램 내의 자유도를 조금만 더 줬더라면 더 이야기 진행이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또 <무한도전>에서 시도하다 출연자들의 돌발 행동에 따라 허무하게 끝나버린 좀비 이야기처럼 생존자들이 똘똘 뭉쳐 생존만을 바라보는 게 아닌 많은 시청자의 인식에 깊이 박힌 노홍철의 캐릭터를 살리거나 의외의 인물을 활용해 배신과 배신의 연속을 보여줬더라면 또 다른 재미가 있었을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기시감 느껴지는 예능 프로그램 홍수 속에서 조금은 새로운 길을 만든 프로그램이 <좀비버스> 같다. 극한 상황 속 긴장감을 유발하려 하는데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여러 출연자의 대처와 티격태격하는 행동을 지켜보며 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예능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아 참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