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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May 06. 2024

철덕을 만났다

노동요 - 철도 인생

가끔 어떤 역에 도착하면 역 끝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100퍼센트 확실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들의 행동 특성상 대부분 이들은 철도를 좋아하는 ‘철덕’임에 틀림없다.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일본어 ‘오타쿠’. 우리말로 순화하면 ‘마니아’다. 오타쿠를 우리말 발음으로 ‘덕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철도에 푹 빠진 사람을 ‘철도 덕후’, 줄여서 ‘철덕’이라고 부른다. 순화어로는 ‘철도 마니아’라고 하지만 이 수많은 표현 중 보통 나는 철덕이라고 부른다. 악의적인 표현이라기보다 내 입에 잘 맞고 뭔가 귀여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철도 관련 일을 하면서도 철도에 관심이 없는 나는 이들이 참 신기하다. 어린아이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포크레인(굴착기)’, ‘비행기’ 등 무생물을 말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런 중장비나 교통수단을 좋아할 나이는 유아기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기차나 버스에 열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내 직업에 대한 의식에 의문을 품게 됐다. 이 직업이 단지 돈벌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나는 저들 같은 열정이 왜 이리 없는지 말이다.


어린이날에 의왕에 있는 철도박물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철도 역사가 가득한 박물관에서 각종 전시는 물론 방문객이 여러 체험을 하도록 체험장을 마련했었다. 한 분야의 진행 요원으로 일했는데 전국 각지의 철도를 사랑하는 어린이들이 모였다. 직원 근무복을 입고 사진 한 장 찍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들은 그들의 대화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 건너편에서 기차가 달려가는 소리를 듣고 “저 열차는 XXX 열차인데 무슨 부품이 어쩌고 저쩌고”, 무전기를 보고 “무슨 모델이고 몇 년 형이야.” 등 각종 제원을 읊는 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나는 전혀 모르고 관심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 아이와 수도권에 오면 롯데월드 같은 놀이공원에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이를 위해 근처 모텔을 잡아서 의왕 철도박물관에 왔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이의 부모님이 뿌듯해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봤을 때 내 생각의 편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아이의 미래가 기대되기도 했다. 이런 철도를 사랑하는 아이가 철도 회사에 다니면 회사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일 때문인지 철덕을 만나면 크게 반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역에서 얌전히 기차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고 다가와서 수고하라고 수줍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상한 요청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어떤 학생이 수줍게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 이따가 출발하실 때 경적 한 번만 울려주시면 안 될까요?”


분명히 자기가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텐데 친구가 듣고 싶어 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경적을 울려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 울리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용 시기가 이상할 뿐만 아니라 경적의 길이가 너무 길어(전동열차는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이 동요가 빠르게 울린다) 이목이 쏠릴 것 같아 안 된다고 거절했다.


내 칼 같은 거절에 실망한 표정이 가득한 그 학생을 보니 내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문득 팬 서비스를 잘해주지 않는 운동선수에 대한 일화들이 떠올랐다. 사인과 사진 촬영 한번 해보고 싶어 다가가 요청해도 차갑게 거절하거나 무시하고 지나가는 이들에 대해 실망한 팬들이 안티 팬으로 바뀌는 일이 있다. 선수들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너무 피곤해서, 많이 해주면 그만큼 자신의 가치가 떨어져서 등 여러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보며 콧방귀가 나왔던 나였다.


학생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이 학생이 실망 가득한 마음으로 철도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렇다고 함부로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오랜 고민 후에  큰맘 먹고 경적을 울렸다. 나름의 고객 서비스라는 생각이었다. 역을 떠날 때 보이는 그 학생의 환호에 나는 간접적으로 스타 체험을 한 것 같았다. 팬의 요청을 기억했다가 이행하면 감동한다는데 내가 그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철덕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요즘 들어 경적 요청을 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데 동호회에서 챌린지를 하는 것인지 그 수가 너무 많아 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철덕이라고 그들의 행동을 순수하고 좋게만 볼 수 없는 때도 있다. 몰래 선로나 철도 관련 장소에 들어와 이것저것 훔쳐 가 자신만의 수집을 늘리는 사람이 있고 판매가 금지된 철도 물품을 철도 직원에게 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철덕의 마음을 이용해 이를 파는 직원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내 생각에 철덕은 나쁜 것보다 잠재력 있는 유망주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축구계에는 유망한 어린 선수에게 주는 ‘차범근축구상’처럼 철덕을 단지 마니아가 아닌 유망주로 생각해 미리 투자하고 이들을 철도 발전의 선봉장으로 삼자며 소정의 장학금 개념으로 ‘철도상’을 주자고 회사에 오래전부터 제안했지만, 회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생각하는지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한편으로는 나라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내가 철도 업무를 계속하고 요직을 맡는다면 언젠가는 한 번 추진해 보고 싶다. 그 옛날, 이 상을 받은 박지성이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가 된 것처럼 한국 철도 발전의 이바지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만일 철덕이 이 글을 읽는다면 한번 제안하고 싶다. 철도를 사랑한다면 철덕에 머물지 않고 직원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지. 하나에 푹 빠져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관련 일을 하는 ‘덕업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 그런 이들이 몇몇 있다. 이들처럼 자신의 철도를 향한 관심과 애정, 능력을 좋은 방면으로 활용하면 더 회사가 발전하지 않을까?


며칠 후 또 다른 역에서 어떤 아이가 열차 사진을 열심히 찍다 내게 경례하는 모습을 봤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이도 기분이 좋았는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고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소소한 행동도 고객서비스라면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계속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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