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액션에 미국 감성
자주 말했지만 내 취향과 관계없이 영화를 누렸던 시기는 학창 시절 학기 말 때였다. 수업 진도 나갈 게 없어 수업 시간 내내 영화를 봤던 그때 주된 영화 장르는 액션과 공포였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비슷한 취향을 가졌던 것인지 화끈하게 뭔가 부수거나 놀라야 하는 장면이 가득한 영화를 자주 보며 쾌감과 불편함 두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봤던 영화중 중화권 액션 스타인 이연걸의 할리우드 진출 영화도 있었다. 어릴 적 누나가 비디오테이프로 보여 준 이연걸의 영화 속 이연걸은 무술의 대가, 멋쟁이의 느낌이었다. 성룡의 코믹함이 섞인 액션과 달리 이연걸은 무술의 정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 속 이연걸은 (아닌 것도 있지만) 같은 동양인인 내가 봐도 조금은 덜떨어져 보이지만 격투 실력을 숨긴 인물인 때가 많았다. 영화 <더 독>의 이연걸도 그랬다.
대니(이연걸)는 바트(밥 호스킨스)의 명령에 복종하며 싸우는 투견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주인으로 모신 바트에게 벗어나 샘(모건 프리먼)과 빅토리아 (케리 던컨)을 만난 후 점점 사람의 감정에 하나씩 눈을 뜨게 된다.
영화는 화끈하다. 액션만 잘 할 것 같은 이연걸이 감정 연기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였다. 또 이연걸의 액션을 최대한 살리되 이야기도 살리기 위해 여러 신파도 집어넣었다. 중국과 미국의 새로운 냉전 분위기의 국제 정세와는 다르게 문화적으로는 중국 액션과 미국 감성이 잘 섞여 있다. 하지만 앞서 내가 말했던 것처럼 중화권 활동과는 다른 모습의 이연걸을 보며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과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이 다문화 국가이기 때문에 영화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이다. 그래서 사회 공부를 하면 들어봤을 ‘멜팅 팟’과 ‘샐러드 볼’이 떠오른다. 멜팅 팟은 미국 사회를 표현할 때 인종의 용광로라는 표현으로 번역돼 사용된다. 다양한 문화권 출신의 이민자들이 궁극적으로 미국 사회에 하나로 융합되는 것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샐러드 볼은 샐러드를 담는 그릇이라는 뜻으로 멜팅 팟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우리가 샐러드를 먹을 때 그릇에 다양한 재료들을 넣고 아무리 섞어도 하나의 형태로 융합되지 않는 것처럼 다양한 이민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되 각각의 고유한 특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은 다양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멜팅 팟과 샐러드 볼이 공존하는 사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섞인 듯 섞이지 않은 모습에서 알게 모르게 동양인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과연 이연걸이 바트 역할을 하고 대니 역할을 할리우드 액션 배우가 맡을 수 있었을까? 수업 시간에 이 영화를 보며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단순하고 무식하게 부수고 두들겨 패는 액션의 과격함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동양인에 대한 묘사가 아쉬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소룡, 성룡 등 영화 속 멋진 역할을 도맡으며 엄청난 호응과 찬사를 받던 동양의 스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물론 지금은 많이 상황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잔재를 볼 때면 여전히 씁쓸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