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따라 바뀐 운명
아끼는 사람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을 꾼다면 격려할 것인지 단념하게 할 것인지 고민할 때가 있다. 어리다면 응원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면 쓴소리하는 때가 많다. 나는 늘 전자를 선호하지만, 현실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하는 것 같다. 내가 꿈꾸는 당사자라면 어떨까. 꿈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꿈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도전할 것인지 타협할 것인지 고민하는 때가 셀 수 없을 만큼 잦다. 도전과 타협의 가치를 두고 대립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탈주>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휴전선 인근 북한 최전방 군부대에서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은 탈주를 준비한다. 하지만 계획을 알아챈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이 먼저 탈주를 시도하고, 말리려던 ‘규남’까지 졸지에 탈주병으로 체포된다. 탈주병 조사를 위해 부대로 온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은 규남을 계속 곁에 두려 하지만 규남이 탈출을 감행하자 추격을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보여주는 것은 규남과 현상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규남은 정해진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탈출을 시도한다. 그 절박함과 도전에 하늘도 감명한 것인지 규남은 운이 참 좋다. 수많은 위기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적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규남의 분투기도 눈에 띄지만 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현상이었다. 주인공인 규남의 뒤를 쫓는다고 해서 현상을 완전한 악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왠지 악인이라면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지만 현상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면서 규남을 동생으로서 아끼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자신을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현상은 규남이 탈주병으로 체포되었을 때 주자에서 탈주범 체포 영웅으로 둔갑시킨 것도 사단본부 사단장 보좌로 보직 변경하도록 도와줬다. 더 예전으로 돌아가면 규남이 탐험가의 꿈을 꾼 계기인 노르웨이 출신 탐험가 로알 아문센의 전기를 규남에게 선물한 사람도 현상이다. 진짜 격려인지, 아무 생각 없이 준 것인지 혹은 동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규남을 부추긴 것은 결국 현상이었다.
현상은 영화 속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자 더 알고 싶게 하는 인물이다. 그도 꿈을 키워왔던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로 꿈꾸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군인이 되어 보위부 핵심부에 오른다. 러시아 유학 중 만났던 동성 연인과 단꿈을 꾸었지만, 북한이라는 현실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순응하고 사는 현상에게 규남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규남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하거나, 운명은 자기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규남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규남처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처럼 느껴졌다. 규남이 꿈꾸게 한 장본인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러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현상은 안타까우면서도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진짜 주인공이었다.
10대와 20대의 나는 규남이었다면 30대의 나는 현상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마음은 규남을 따라가고 싶지만, 현실에서 시간이 갈수록 현상이 되는 내 모습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규남처럼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에 대한 고민. 하지만 내가 직면하는 현실의 벽은 너무나 많고 높다. 놓아야 할 것도 많아서 더 머뭇거리게 된다. 규남도 현상도 지금의 나로서는 한쪽의 편을 들 수 없이 모두 이해되는 인물이었다.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을 다룬 영화는 이전부터 많았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갈등을 부각하는 영화가 대부분인데 <탈주>는 현실에 관한 고뇌를 다룬 작품이다. 꼭 남북 상황을 설정하지 않았어도 메시지 전달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 설정을 활용하니 메시지가 더 강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참 흥미로웠다. 남북 대치를 다루더라도 첩보나 전쟁 같은 장르로만 소모하지 말고, 다양한 주제 의식을 보여주고 시선을 끌기 위해 시도하는 영화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