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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Dec 26. 2020

주작의 시대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마지막에는 성공으로 끝이 나는 신데렐라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주 만나는 구조다. 드라마에서는 시대와 인물의 직종만 다를 뿐 경제력의 차이가 있는 두 집안의 자녀가 사랑으로 갈등을 이겨내고 낮았던 지위가 급상승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예능프로그램에서는 한동안 인기 있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려운 삶 속에서 가수의 꿈만 품은 채 전혀 다른 길을 걷던 이가 한 명의 스타로 거듭난다.


허름한 외모의 신데렐라가 파티를 준비하는 공주님이 되도록 마법을 부리는 요정이 존재한다. 드라마와 예능 속 인생 역전의 이야기에도 누군가의 지지가 뒷받침되어 있다. 바로 대중이다. 콘텐츠를 보는 대중이 요정이 되어주는 것이다. 대중의 반응에 이야기 진행과 생존 경쟁의 승자가 바뀐다.


인생 역전은 누구나 한 번씩은 꿈꾼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를 간접적으로 충족시켜주는 대리만족형 콘텐츠가 등장했다. 드라마 외 콘텐츠를 살펴본다면 게임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딸을 왕국의 공주로 키우는 것이 목표인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나 다양한 미소녀를 내 여자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두 현실에서는 힘들지만 내가 주인공을 돕는 지지자가 되어 내 로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는 지지자들의 지지로 조연급 캐릭터가 메인 히로인의 인기를 추월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동급생> 시리즈의 ‘타나카 미사’다. <동급생>의 자타공인 메인 히로인은 ‘사쿠라기 마이’다. 상냥하고 모범적인 마이와 달리 운동신경이 뛰어난 육상선수 미사는 주인공에게 함부로 대한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유저들에게 미사의 ‘츤데레’함과 그 유명한 ‘포니테일’은 큰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되었다.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에서는 미사가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비중을 차지해버렸으니. 여론의 영향이 콘텐츠 속 인물들의 입지 변화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내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입지가 변하는 콘텐츠는 게임을 넘어 방송으로도 발전했는데 이를 잘 활용한 것이 <프로듀스> 시리즈다. 나의 지지가 주인공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수많은 연습생 중 내 취향을 자극하는 인물을 적극 지지해 아이돌 그룹의 최종 멤버로 만드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이다. 게임의 행복한 결말을 위해 투표를 꼬박꼬박하고 다른 사람의 지지를 유도한다. 지지한 이가 최종 멤버로 발탁되었을 때 쾌감은 열과 성을 다해 미소녀의 호감을 얻어 커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언가의 방해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됐을 때 기분은 최악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인물이 득표수가 적어 탈락의 쓴잔을 마신다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가.


하지만 만약 그게 다른 유저들의 취향에 밀린 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일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면? 우습게도 이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 일이 한 번도 아닌 계속 있었다. 정정당당해야 하는 서바이벌에서 투표 조작이 생긴 것이다. 담당 PD는 기획사의 접대를 받고 시청자의 투표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수혜를 입은 연습생도 있지만 많은 지지를 받았던 수많은 연습생이 데뷔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아쉬움이 남았던 지지자를 분노하게 만들고 맥이 빠지게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요정의 축복은 이야기를 움직이기 어렵다. 그보다 더 막강하고 막을 수 없는 힘이 이야기를 움직인다. 그 힘이 너무 거대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좋아하는 것만이 아닌 기본적인 우리의 인식에도 조작된 내용이 영향을 미친다.


마틴 하이데거는 “기술 혁명의 파도는 인간을 꼼짝 못 하게 넋을 빼놓고 눈을 멀게 하고 현혹해 특정한 아이디어가 어느새 유일한 사고방식인 양 받아들여지고 실행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누구나 익숙한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특정 단어나 인물 등이 높은 순위에 있다면 찾아본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이고 진리인 것처럼 여긴다. 그것이 조작으로 만들어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미 음원 순위는 물론 맛집 순위, 정치 이슈 등도 조작으로 인해 자유자재로 바뀌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누군가는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공정해질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누군가는 악용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 같은 ‘주작’이 판을 치는 시대에 감동적인 이야기는 나오기 힘들다. 감동을 얻더라도 만들어진 감동이라는 의심을 벗어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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