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진 Jul 05. 2022

사랑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죄의 가치

박찬욱, <헤어질 결심>을 보고


※ 작품 속 특정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특정 장면에 대한 묘사도 스포일러라면 약한 스포일러가 될 수는 있겠습니다.












 우리 솔직해지자. 사랑과 죽음은 이제 너무나도 지겨운 단어이지 않은가. 우리는 문학, 영화, 드라마, 그림, 연극, 전시, OTT 서비스 등 손만 뻗으면 향유할 수 있는 작품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중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사랑을 다뤘고, 또 죽음을 다뤘던가.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사랑 혹은 죽음을 다룬 작품에 열광을 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랑과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술인들에게 희극인 동시에 비극이다. 지치지 않고 새로운 사랑과 죽음을 늘 탐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희극일 테지만, 내가 어떻게 해도 사랑과 죽음에 대한 완벽한 해석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이 된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자신만의 사랑-죽음론을 담고 있다. 나는 어제도 사랑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 영화 속 사랑과 죽음은 또다시 낯설다. 그리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거북해진다. 소설가 김훈의 신작 속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섭다. 이 단어를 오래 생각하고 있으면 사랑에 내가 잠식당하는 느낌이 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대답이 오고 갔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답을 내린 각기 다른 사랑의 정의 중 거의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그 유명한 문장을 언급해 본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맞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일찍이 발명해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각자의 해석을 덧붙여왔다. 모든 인간에게 사랑은 자기만의 의미로 늘 재발명된다. 인간은 어떻게든 사랑을 재발명하여, 사랑을 이해하고자 끝내 노력할 존재다.



 죽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몇 개의 글들을 인용해 본다. 우선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두가 익히 아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고전적 낭만 그 자체의 표본이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조금 다른 형태의 사랑을 보이고 있다. "모든 건강한 존재들도 많게든 적게든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이와 더불어 롤랑 바르트도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건 나의 죽음이 누군가를 죽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의문이 든다. 대체 왜 사람들은 사랑과 죽음을 엮어서 생각하는 것일까. 사랑은 그냥 사랑이고, 죽음은 그냥 죽음이면 되지 왜 굳이 그렇게 엮곤 하는 것인가. 대체 왜 인간들은 개념의 재정립을 통해 사랑과 죽음을 그토록 지독하게도 엮어내고자 하는 것인가.



 누군가가 죽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삶을 종료한다. 급사를 제외하곤 병자를 둘러 서서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게 우리 사회의 암묵적 규칙이며, 죽음의 순간엔 사랑이 함께 하는 것이 예의이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 속 어느 장면은 조금 다른 구도에서 이 관계를 비춘다. 여기, 죽음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사리 죽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 죽기 직전까지도 의식이 있는 게 사람이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죽어가는 삶.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자가,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죽음에 잠기는 삶.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미화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사랑이 들어가면 뭐든 쉽사리 미화가 된다. 그게 사랑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죄의 가치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사랑이라 말하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감정이 있다. 나는 사랑이 죄스럽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관찰력이 좋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누군가의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려 드는 형태로 존재한다. 내가 타인의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고 확신이 들 때 떠오르는 사랑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인 이상, 나는 너와 같아질 수 없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온전히 접속할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의 표정, 행동, 대화 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을 추측하는 영역의 교집합은 그리하여 늘 왜곡되어 있다. 왜곡된 마음의 영역을 사진 찍는 일을 상상한다. 아니 그건 사실 상상이 아니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그것을 이미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귀엔 아직도 작중 주인공이 사용한 번역기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맴돈다. 대화에는 표정과 비언어적 표현 등이 수반되지만, 번역기의 음성은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으며, 어느 부가적인 요소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히 덤덤한 목소리만을 산출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던 외국어가 번역기의 덤덤함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뀌는 순간, 언어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두 사람은 사랑에 더 가까워진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영화가 결코 로맨스만을 진득하게 다루는 낭만적인 감성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사랑과 죽음을 담고 있지만, 나아가 불륜, 안개, 폭력, 성, 죄의식, 구원이라는 긴장 형성 요소까지 충실히 내포하고 있다. 모든 개념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사방에서 조여 오는 가운데 두 인물은 덤덤한 목소리를 통해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 아, 이 어색함. 이 낯섦. 이 애절함. 이제 이 탄식들조차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미화되려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되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으로 빠져든다.



 앞서 계속 적었듯, 본 영화는 명실상부 사랑과 죽음의 콜라주 작품이다. 하지만 박찬욱은 거기에 구원의 요소를 더한다. 이를 통해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며 죽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란 이분법을 더욱 과감히 해체한다. 빛은 전통적인 구원의 이미지다. 하지만 시체를 비추는 시체실의 빛도 구원의 이미지인가? 두 빛의 이미지가 교차되는 장면이 있다. '시체 = 죽음'과 '당신 = 사랑'이 교차되는 장면. 이 장면 이후로 빛은 더 이상 구원으로 남아 있지 않고, 이제 그것은 오히려 아름다운 죽음처럼 느껴지려 한다. 바다에 빛이 비쳐 산란되며 부서지고 있다. 죽음으로부터 오는 미의 이미지를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연출은 죽음조차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 나는 그것이 두렵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죽음은 사랑으로 인해 아름다워진다.



 그래도 죽지 말아라. 혼자 봐서 다행이었다. 누구든 옆에 있었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백을 채우지 않기에 여운이 남는 영화다. 내가 그동안 '잊고 싶다'는 말과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혼동하여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이 영화가 내 인생 영화가 될 것이란 예감이 강렬히 든다. 내가 이 운명적 직관을 충분히 설명했는지 글을 검토해 본다. 그런데 잠만, 내가 박찬욱을 설명하겠다고 본문에 인용한 사람들이 랭보, 셰익스피어, 카뮈, 롤랑 바르트다. 나는 어쩌면 박찬욱을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이 리뷰를 작성한 퍽이나 큰 결례를 저지른 건 아닐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그 유명한 서구의 지성들조차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긴 여운을 느낄 것이란 강한 확신이 있다. 나는 내가 믿는 자들을 믿기에, 이 영화가 가진 힘을 굳게 믿는다. 영화가 완전히 종료되고 영화관의 불이 켜질 때까지 외마디 탄식을 뱉으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심이었다. 75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작가의 이전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슬픔이라 적는 것이 최선인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