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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Aug 13. 2022

시를 읽고 위로받던

 최근 몇 달 동안, 여러 권의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엔 잘 읽지 못했다. 재미도 없었고,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분하는 자신만의 기준도 없었으며, 어떻게 읽는 게 올바른 방법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꾸준히 읽었다.


 아름답고 튼튼한 문장을 발굴하는 마음으로 읽으니 조금 더 재밌었다. 노래도 멜로디보다 가사에 집중하는 사람인만큼, 시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어떤 구절은 밑줄을 긋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기도 하였다. 문장 수집가처럼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문장들은 대부분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내가 모아둔 문장들이 모두 사랑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실소했다. 사랑에 매번 재앙, 유죄, 붕괴 등의 개념이나 갖다 붙이는 사람이 아름답다며 모아둔 문장들이 대부분 사랑에 관련된 것들이었다니.



 그즈음, 그런 생각을 가졌다. 인간에게 어떤 개념은 어떤 술어를 가져다 놓더라도 모두 이해되는 말들이겠구나. "사랑은 __이다"에서 빈칸에 무얼 넣어도 인간은 끝내 그것을 이해해낼 존재들이지 않는가. 심지어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라고 적더라도 지구 속 누군가는 적확히 공감한다며 박수를 칠 것이다.


 



 하지만 시는 정말 아름다운 문장들의 집합에 불과한 걸까? 아니다. 시는 공백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체의 외피다.


 정체 모를 우울을 안고 지내던 밤이 있었다. 할 일도 없는데 빌린 책이나 읽고 반납하자는 마음으로 시집을 펼쳤다. 그런데 읽다 보니 위로가 됐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나, 이런 형태의 마음은 처음이 아니었다. 일기를 쓰며 느낀 안도감과 자기반성, 평안함과 닮은 감정이었다.


 시는 본디 함축된 형태로 작성되기에 필연적으로 여백을 내포한 형태의 글쓰기이다. 이 여백은 독자의 경험으로 채워진다. 모든 시는 불완전한 형태로, 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자로 하여금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물질화된 글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재창조되는 과정은 일기를 쓰는 과정과 유사하다. 일기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하루 동안 느낀 마음을 물질화된 글로 남겨 두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 이후로 시가 주는 위로와 안정의 힘을 믿기로 했다. 좋은 글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겠구나. 글이 담긴 지면을 숨의 권역으로 삼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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