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으로 마주한 현실, 베니스 교환일기 EP13]
살아가기 버거울 때 한 번씩 '끝'에 대해서 생각한다.
걷는 길의 끝을 알 수만 있다면 인생이 조금 더 수월할 텐데.
이 길의 끝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이 길의 끝에 절망뿐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다른 길을 택할 텐데.
이 '끝'을 바라보는 마음은 여행 중에도 마찬가지여서
여행객으로서 왔다 가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이곳의 끝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여행에 임하곤 했다.
그리고 베니스는 끝을 보기에 참 적합한 곳이었다.
섬 도시인 베니스는 한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걸어서 2시간이면 충분하다.
베니스 섬의 중심쯤에 머물던 나에게
베니스의 모든 끝은 한 시간 걸음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베니스의 끝은 진짜 끝인 느낌이 든다.
바다로 둘러싸여, 배를 타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진짜 끝.
섬 안에서만 꼼꼼히 둘러보면 그 너머에 내가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진짜 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을 볼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이쪽 끝 저쪽 끝을 다 보고 나면 더 이상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
이제 그만 걸어도 된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섬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섬의 끝, 해질녘 바다 앞에 서 있었고
해가 지며 바다가 분홍색으로 또 보라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다 보고 나서 집에 돌아가곤 했다.
게다가 베니스는 잘 변하지 않는다.
본섬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법이 없고
한 번 자리 잡은 가게도 망하거나 바뀌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약간의 과장을 더해서, 매일 아침 주택가에 널려 있는 빨래의 모양새까지 비슷하다.
반년 정도 살면서 베니스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다 보면
'이 정도면 나는 베니스는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물리적인 끝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끝도 맛볼 수 있는 곳.
'변화가 거의 없는 이 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이다.
어디에 살고 있건 간에
대체로 자신의 일터와 집을 오가며 밥벌이를 해내고
즐겨 찾는 몇 군데의 카페, 식당을 정해놓고 다니며
가끔씩 새로운 것을 즐기는 수준에 그친다.
오히려 다소 비슷하고 무료하더라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매일같이 유입되는 관광객들을 보며 소소한 낯섦을 느끼는 베니스 주민으로서의 삶이
더 새롭고 다채로울 수도 있다.
매일같이 큰 변화를 바라며 살 수는 없다.
내 인생에 안정된 구석이 있어야 새로운 것도 눈에 들어온다.
불안한 상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움은 나의 안정성을 해치는 위험 요소가 될 뿐이다.
끝이 있음을 명확히 느끼는 삶을 살며 불규칙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맞이하는 것,
지금의 내가 느끼기엔 이쪽이 더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