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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띵프 Aug 14. 2022

1분 단편소설 '인생 리셋의 날'

잔재주모음집 05.

눈이 떠진다. 기대감 때문인가. 컴퓨터 전원을 켠 듯, 평소와는 다르게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가방을 챙긴다. 전해줄 물건들, 중요한 정보들,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 이 한 번의 여행으로 모든 게 바뀔 테니까,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사실, 얼마나 오랜 기간 꿈꿔왔는지 모른다. 내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게임 속 캐릭터처럼 스텟을 재분배하고, 원하는 능력을 이만큼 키워, 내가 꿈꾸던 모습으로 다시 살 수 있다면! 그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생 리부팅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해 주신 황 박사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황 박사님은 아직 기계가 완성 단계는 아니라고 항상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는 항상 기꺼이 희생양이 되겠노라 말씀드린다. 이 인생에 큰 미련이 없거든.

잘못된 선택으로 놓친 게 어디 한두 개겠냐마는, 내 인생은 유독 그랬다. 순간의 선택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결과와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웠달까. 남들 만큼만 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연봉 좀 높여 받고자 이직한 회사가 2년 만에 망할 줄 누가 알았겠어? 어떻게든먹고 살겠다고 퇴직금 털어 투자한 땅이 헐값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내 아들 딸 밥 한 끼 겨우 먹이는 이 삶, 안 살아도 그만이다. 아니, 다시 살아야 한다. 무조건.

그래서 이것 저것 챙길 게 많은 것이다. 일단 내가 썼던 일기들. 과거의 나에게 반면교사가 되어 줄 내 일기장이 필요하다. 이렇게는 선택하지 마라, 리부팅 될 나야. 그리고 인터넷을 뒤져 로또 당첨 번호를 찾는다. 황 박사님 말에 따르면 대략 한 10년 정도 전에서 인생이 리부팅이 된다고 하니 10년 전 로또 당첨 번호를 찾았다. 리부팅 된 인생은 시작부터 풍족했으면 한다. 내 아내, 자식들에게도 좀 여유 있는 삶을 선물하고 싶다.

여기에 더해, 내가 꼭 잊고 싶지 않은 10년 간의 기억들을 챙겼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누구와 어딜 갔었는지를 기록해 둔 메모와 꼭 추억할사진들, 그리고 영상파일까지 USB에 꼼꼼하게 담았다. 리부팅 된 내가 이 기억들만은 꼭 다시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내가 이렇게까지 철저하다. 새로운 삶을 살겠지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부분만 바꾸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가!

밤 11시 30분. 황 박사님 연구실을 찾았다. 12시로 예정되어 있는 리부팅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찾은 연구실은 조용했다. 이미 준비를 리부팅 기계만이 공회전하고 있었다. MRI 검사기 혹은 캡슐호텔처럼 생긴 저 기계가 내 인생을 과거에서부터 리부팅해 줄 것이다. 기특한 녀석. 엄청난 기능에 비해 생긴 게 약간 엉성한 느낌은 든다.

“이제 한 20분 정도 남았는데,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황 박사님은 다른 실험자에게 으레 묻는 것처럼, 무뚝뚝한 모습으로 나에게 물었다.

“걱정 마세요! 후회할 거면 진즉에 했겠죠. 이젠 미련 없습니다.”

황 박사님은 먼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기계 안으로 안내했다. 리부팅을 돕는 정맥 주사를 맞고 기계에 누웠다. 아내는 나에게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한다. 나 역시 ‘바뀐 모습 그대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다시 보자’라며 손을 흔들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기계는 황 박사님이 누른 버튼 한 번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굉음을 내며 내 몸을 위아래로 훑더니 이내 기계의 불이 꺼졌다. 암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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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무리 되었습니다. 집에 가시면 매일 하시던 것처럼 가방 다시 풀러 놓으세요. 내일 다시 가방 싼다고 할 테니까요.”

“네, 선생님. 좋은 아이디어를 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 이가 아예 정신을 잃기 전에 ‘인생 리부팅’ 얘기를 들었으니 망정이지. 매일 아침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게 됐다면서 행복하게 일어나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흑흑.”

“앞으로 치매가 더 심해지면 이것도 안 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계시구요. 이제 충분히 잠에 빠진 것 같으니 남편은 집에 데려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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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떠진다. 기대감 때문인가. 컴퓨터 전원을 켠 듯, 평소와는 다르게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가방을 챙긴다. 전해줄 물건들, 중요한 정보들,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 이 한 번의 여행으로 모든 게 바뀔 테니까,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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