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디제이 숙소에서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쉬는 날이면 본가에 가곤 했다. 혼자서 식사하실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한 끼라도 챙겨드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를 어려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나는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탓에 아버지와의 냉전이 계속되었다. 술에 취해 아침에 들어오는 것은 기본이었고, 쉬는 날 저녁이면 예술병에 걸린 듯 음악을 쿵짝쿵짝 틀어대며 아버지의 밤잠을 방해했다. 아버지의 불면의 원인은 시끄러운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취업을 준비할 나이에 먹고 살 걱정 없이 음악에만 몰두하는 아들이 걱정스러우셨을 것이다.
매일같이 다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아버지의 한마디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빠라고 낭만이 없었는 줄 알아?"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앞뒤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보였다. 기름때 묻은 아버지의 얼굴과 손, 깊어진 주름이. 나의 무책임함 때문에 외면하고 있던 모습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를 단지 ‘아빠’로만 보았던 시선이 무너지고, 나는 홀로 전쟁터에 내몰린 한 소년을 보았다.
나는 감히 아버지의 외로움과 무게를 헤아릴 수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무게와 함께 떠올랐다. 어릴 적 생일에 쳐주시던 기타, 송골매 LP, 나팔바지와 오버카라 셔츠를 입고 있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진. 이 모든 것이 기름때 묻은 주름 뒤로 겹쳐 보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사실 그 당시는 할아버지, 엄마, 할머니가 연달아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엄마,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다짐이 고작 이런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모습이었다니. 내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도 낭만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의 낭만을 위해 젊은 시절의 낭만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낭만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카센터였을지도 모른다. 가게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큰누나가 수상한 서예 액자가 걸려 있었고, 상패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태권도복을 입은 내 사진과 메달, 필름 사진들. 어쩌면 이것들 모여있는 그 공간이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낭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낭만’이라는 말이 가볍게, 유행어처럼 소비된다. 하지만 그 낭만을 떠받치고 있던 누군가의 희생을 생각하면, 나에게 이 단어는 너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