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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휴머니즘 영화들

기생충 미키17 설국열차 (스포)

by 이주낙

나는 불편한 영화를 좋아한다. 불편함 때문에 인상을 쓰기도 하지만, 그 불편함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 이면에는 현실이 조금은 달라지길 바라는 조용한 인간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 기생충

가난한 사람은 냄새로 규정되고, 효용에 따라 가치를 정한다.

부자 가족은 가사도우미나 운전기사를 돕는 척하지만, 결국 '서비스'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재밌는 건, 반지하 가족도 마찬가지다. 생존을 위해 부자 가족을 수단화 하는 것은 같다.

인간을 수단으로 쓰는 구조는 부만의 것이 아니다.

수단화하게 만드는 그 구조 자체가 구성원 모두를 닮게 만든다.

결국 수단화된 인간들과 그 기만의 끝은 파국이다.



- 미키 17

주인공은 죽을 때마다 복제된다. 그는 기술에 의해 ‘무한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나 기억, 감정, 공포, 고통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복제 가능한 인간이라는 설정은 근미래의 극단적 공상처럼 보이지만, 산업과 자본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인간의 가치를 현실에서도 종종 목격한다. 대체 가능한 몸이라는 발상은 이미 현실이다.

아도르노가 말한 도구적 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 설국열차

기차는 인류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공간이지만, 그 생존은 ‘계급의 정지’를 전제로 유지된다.

꼬리칸은 앞칸으로 나아가려 하고, 앞칸은 그들을 억제하기 위해 ‘질서의 필요’를 말한다.

여기서 질서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권력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듯하지만, 실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구조를 절대화한다.

윌포드는 말한다.

“누군가는 제 자리를 알아야 해.”

이 영화는 수단과 목적의 전도를 통해 권력 구조의 폭력을 비판한다.

계급은 더 이상 단지 위치가 아니라, 신념이 된다.



이 영화들이 역설하는 것은 "사람이 먼저"라는 휴머니즘이다. 요즘 이런 말들이 오글거리고,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는 정치인들의 선전용 문구로 전락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외치는 쪽의 반대편에서는 사람을 득표의 수단으로 여기는 포퓰리즘이라며 비판한다. 이런 당연한 말조차도 진심이 없어진채 갈등과 권력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말을 인용하면서도, 정작 인간을 수단으로만 소비하는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이런 현실을 비판하는 불편한 영화들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이후 끊임없이 등장해왔고, 이는 인간이 여전히 수단의 굴레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증거다. 동시에 그런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려는 시도와 바람 역시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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