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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스포)

얕은 영화 감상

by 이주낙

불편한 영화를 찾던 중 발견한 영화..

감독의 전작 <유전>에서 지리는 경험을 했는데, 이번 영화의 플롯도 전 작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보여지는 미장센의 분위기는 비슷하면서도 색다르다.

빛과 밝기, 통일된 의상, 형형 색색의 꽃들과 공간 디자인 등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미장센은 보통 공포장르영화와 분명히 다른 느낌을 준다. 이 것들은 분명 주제의식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공포는 밝은 햇빛 아래, 비슷한 옷을 입고 웃고 춤추는 사람들의 폭력, 그 폭력은 연대를 명분으로 포장되며, 그 연대는 고립보다 훨씬 더 무서운 방식으로 개인을 억압한다.

어두운 고립보다 무서운 것은 밝은 연대


- 피상적 관계와 고립

감정 없는 연결은 단절보다 독하다.

영화 초반부 가족을 잃고 감정적으로 단절된 연인 관계 속에서 대니는 끝없는 고립감을 느낀다.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불안과 상실을 그저 챙기지 않으면 안 될 같은 피상적인 의무의 대상으로 생각 한다.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을 나누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기능적으로만 바라보는 관계. 대니가 처한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그건 표면적인 관계 속에 갇힌 정서적 고립이다. 이는 오히려 단절된 것보다 위험하다.


- 강요된 연대 수단화된 개인

처음 대니가 환각제를 마시고 경험하는 것은 경계의 붕괴이다. 손이 흙과 뒤섞이고, 꽃이 살아 움직이며, 주변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융합된다.

함께 울고, 함께 숨 쉬는 사람들. 누군가의 감정을 공동체 전체가 똑같이 흉내 내며 공감하는 듯한 장면들은 대니에게 . 감정을 강요하고 공동체로의 흡수를 강요한다.

그 후 공동체는 목적이 되어야 한 인격을 의식을 위해 소모되는 수단으로 다룬다. 메이퀸이 된 대니 뿐만 아니라 불타 죽는 9명의 사람, 근친으로 장애를 갖게된 매신저 등 모든 구성원 뿐만 아니라 외부의 개인까지도 공동체 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곳에는 밤이 없다. 어둠이 없는 세계는 숨 쉴 틈이 없다. 잠도 같은 공간에서 다 같이 잔다. 이 공간은 ‘모두가 보는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어둠조차 가질 수 없다. 어둠이 없다는 건 안전함이 아니라 개방과 감시로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니는 결국 사람들이 불타 죽는 것을 보고 웃는다. 그 미소는 고립으로 부터의 해방이다. 결국 고립에서 해방되고 연대하면서 끝이 났지만, 그 연대는 자발적인 연결이 아닌 선택 불가능한 강요와 폭력의 결과다. 그녀는 자신이 찾던 유대를 찾았지만, 그 유대로부터 자율성과 감정, 판단력, 윤리까지 빼았겼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고, 사람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이다.



안무서워 보이는 것들의 무서움


미드소마의 미장센은 북유럽의 이미지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그곳엔 괴물도, 귀신도, 어둠도 없다. 대신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꽃을 엮으며, 햇살 아래에서 노래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선량함’의 모든 상징들이 그 안에 있다. 이런 분위기에 현혹되어 윤리적 딜레마의 경계를 파괴하는데 그 중에는 극단적 상대주의가 있다. 영화는 그 상대주의가 어떤 지점에서는 도덕적 마비를 불러 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 형형색색의 위협

영화의 색은 밝고 따뜻하고 동화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요즘말로 괴랄하다. 낯선 이들을 유인해 죽이고, 이방인을 제물로 삼으며, 근친, 자발적 죽음을 축제로 포장한다.

이러한 시각적 아이러니는 폭력을 합리화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미적 전략이다. 관객조차 착각한다. 대니의 환희 어린 미소를 보며, 마치 해피엔딩이라도 도달한 듯한 감정을 느낀다. 혼란스럽다.


- 극단적 상대주의

마을을 장식하는 다양한 꽃들의 색채처럼 그 존재들를 하나 하나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의 방식과 전통이 있다.” 외부인이 불쾌해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전통이고, 의식이고, 문화라는 명분으로 면죄된다.

영화 중반, 노인이 절벽에 자살을 하는 장면이 분위기 전환점이다. 그 전까지 뭔가 이상한 느낌만 받았다면, 일그러진 얼굴과 망치로 확인 사살...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극단적 다양성의 환상과 맞닿아 있다. 문화 상대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한 태도지만, 최소한의 윤리를 초월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상대성이 모든 폭력을 면책시킬 수 있는지, 인간성이 상대성과 어디까지 타협될 수 있는지, 영화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꽃들로 무엇을 얼마나 감쌀 수 있는지 질문한다.


- 악의 평범성

마을 사람들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점이 가장 섬뜩하다. 공동체 내부에서는 "우리만의 방식" 이라는 프레임으로 받아들이려하고, 외부인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려 애를 쓴다. 이때 발생하는 윤리 판단의 중지, 악을 악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 판단 정지에는 환각제가 또 개입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제공되는 음료, 음식, 연기, 풀은 끊임없이 그들의 인식을 흐려놓는다.

미드소마에서 무서운 것은 안무서워 보이는 밝은 것들, 어쩌면 그 안에 평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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