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감상 (240619)
유튜브인가 어떤 짤에서 어떤 정신과 의사가 말한 것 같다.
청소년기의 뇌는 전두엽이 미성숙한 상태라, 술 취한 것과 비슷하다.
감정은 들끓고, 이성은 뒤처지고, 자의식은 날뛰고,
모든 말과 행동은 뜨겁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다.
그 시기엔 다들 취해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청소년기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의 초중기 영화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창동 감독은 홍상수 영화를 "먹물들이 자위하는 영화"라고 했다.
그 먹물들이 어디까지 보고 자위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창피하고 오글거리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고 그들은 영화를 보고 있는 나와 마주한다.
극장전의 전상원은 실상 청소년기의 전두엽과 같은 인물이다.
한껏 자의식에 취해 있고, 말마다 자신을 정당화하려 애쓰고,
감정은 지나치게 진지하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그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취해서 죽음을 말하지만,
죽기 전 88보다 말보루 레드를 피고 싶어하며,
어머니 탓을 하며 옥상에 올라가지만, 따라올라오는 사람을 확인하고, 어머니를 외친다.
그를 스크린 너머에서 바라보는 김동수는,
관객이자 또 다른 ‘나’의 그림자다.
그 역시 어딘가 민망하고, 지나간 감정의 파편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둘 다 자의식은 크고, 존재감은 희미하다.
전상원은 영화 속에 있고, 김동수는 영화관에 있지만,
그 둘은 결국 같은 장면 속 반복되는 얼굴처럼 보인다.
전상원과 김동수는 비슷하게 자신을 변명하고, 비슷하게 감정이 과잉되어있고,
너무 찌질해서 이불을 차게 만들어 그들은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같지는 않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시간이 지났다고, 경험이 더 생겼다고,
그 전과 무언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다르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종종 전상원이 되고, 어느 날은 김동수가 되고, 다음 날은 또 다른 전상원으로 돌아간다.
그 민망함의 반복은 우리를 점진적으로 개선시키지 않는다. 다만, 다르게 만들 뿐이다.
이불킥은 반복된다.
하지만 그 이불킥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정확히 같게 두지는 않는다.
그게 성숙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나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지금 이 똥글도 김동수의 마지막 대사 "생각해야 한다"랑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다른 스크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