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외출할 때 음악을 틀던 습관이 없어졌다.
음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스트리밍 시장을 처음 마주했을 땐 '와 세상 좋아졌다' 라고 좋아했지만,
그에 대한 대가로 쏟아지는 선택지속에서 결정마비를 감당해야 했다. 한 곡을 고르기도 힘들고, 노래가 익숙해지기도 전에 새 음원이 그 자릴 꿰차고 들어온다.
한 곡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지니, 꽂히는 한 곡이 주는 그 예전의 그 감흥을 느끼기가 힘들어졌다.
(나이가 들어서도 있겠지만...)
선택의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다고 믿지만, 역설적으로 착각일 수 있다.
선택은 감각을 소비하며,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은 무차별성과 피로를 동반한다.
지금 우리는 플랫폼 속 수천만 개의 음악, 수많은 스타일의 옷, 무수한 콘텐츠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선택 한다. 이때 선택은 자유라기보다 일종의 업무가되고 피로가 된다.
이 선택업무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무취향'이다.
무취향이란, 정말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음이 아니라 감각의 마비 상태다. 좋고 나쁨을 가릴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선택 자체가 과로로 느껴질 때, 사람은 ‘무난함’을 택한다. 무난한 레귤러 핏의 검은색 무지 티셔츠, 멜론 TOP100, 점심메뉴는 돈까스 제육국밥.. 이는 단지 취향의 부재가 아니라 의미 없는 선택 속에서 피신한 생존의 결과일 수 있다.
선택의 자유는 언제나 거절할 선택과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자기 감각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고르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자유, 그 또한 감각적 주체성을 구성한다.
무취향 역시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취향 또한 트랜드나 브랜드가 되고, 그 흐름에 편승하기만 한다면 이 또한 자본사회의 회로에 편입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아도르노의 시각에서 본다면 시장이 던져주는 무취향도 취향이 아닐 수 있다.
결국, 좋아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감각이던 혹은 고르지 않을 자유인 무취향이던 모두를 주체성 안에서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요한 건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선택의 배경과 동기, 주체성의 유무에 따라 도피가 될 수도 저항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