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으로 난해하게 만드는 지적 엘리트 주의도 잘못이지만, 철학이 문제집처럼 쉽게 정리될 수 있다고 선전하는 사람도 옳다고 할 순 없다. 가능하면 철학을 쉽고, 친절하게 제 뜻을 전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는 없겠으나 어려운 철학이 나쁘다고까지 수긍하기는 어렵다.
쉬움과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그 분별의 날카로움을 생략한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복 하려는 이분법적 태도가 더 문제다. 물론 한줄로 정리되는 단견이 진실을 빛나게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이 다난한 것 처럼 복잡한 세상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영토다.
아도르노의 말처럼 고귀한 텍스트는 거미줄 같다. 촘촘하고 투명하며, 탄력있고, 견고하다.
놀라운 사상은 촘촘하고 견고하기에 까다롭다. 위대한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철학자들의 지적 허영이나 엘리트 의식탓이 아니라 그것이 매우 견고한 건축물이기때문이다. 이 견고함에는 쉽게 정복 될 수 없는 고지가 있고, 인간의 긍지와 인내심이 쌓여있다. 물론 쉬운 말을 난해하게 비꼬아 밥벌이의 정당성을 살피려는 지식 장사꾼 또한 아직 있다. 그러나 어려운 철학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 보다 쉬운 철학이 구호로 변질되 편견을 조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단발로 이룩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 선전이 그랬고, 경제적으로 잘 살면 행복이 자동으로 인출 될 수 있다던 자본주의 개발 논리가 그러했다. 우리 삶의 진실들은 언제나 복잡다난한데 반해 그들의 구호는 너무나 명료하고 간단하였기에 손쉽게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어려움이 돋아 나려는 비판정신을 마구잡이로 각색하여 제 권력을 키우려는 편협한 거짓이 숨어있다.
쉬운것이 좋다는 편견 때문에 치열하게 가치를 창출하는 철학들이 억압당하고 있다. 사실 어려운 철학이 쉬워질순 있어도 쉬운 철학이 깊어질순 없다. 짧고 쉬운 구호들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억압을 받아왔던가. 사람들이 쉬운 사상만을 탐심하면 어려운 사상은 폐기처분 되고 그 공부에 전념하는 노고또한 형편 없는 대우를 감내해야 한다. 게으른 남편이 가정을 망치듯 게으른 독자는 세계를 파괴한다. 세계를 그리는 정교한 이론이 철학이라면 그것을 우리를 둘러싼 체제만큼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다. 인식이란 편견과 견해 신경반응, 자기견해, 과정과 과정의 뒤엉킴 속에서 요컨데 날조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단계가 모두 투명하다고 할 수 없는 정글같은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글은 복잡하고 위험하며 불투명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글인데 이것을 간과하는 철학이 쉬울수는 없다. 인디언 속담에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 조급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가 있다. 당신들은 계절의 바뀜도 하늘의 움직임도 응시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늘 생각에 이끌려다니고, 남는 시간은 더 많은 재미를 찾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를 돌아보는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쉬운 것들을 바라는 마음은 다양 각층을 단순화하여 사람들을 일방통행하게 만드는데 마치 인스턴트 식품과도 같다. 쉬운 지식으로 사회를 편견없이 이해할수 없다. 인디언 속담처럼 자기를 돌아보는 충분한 침묵의 시간을 숙성하는 노고 곁에 진짜 중요한 가치들은 빛난다. 그 찬란한 빛들은 간편히 읽히지 않는다. 자연의 세심한 변화에 둔감한 사람이 사회적 약자들이 받고있는 구조적 폐악으로부터 우리를 탈주해낼 이론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돌파해야할 편견은 복잡한 지식을 생략해 단순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습화된 지식을 전복 시키고 날카롭게 다듬는 근기다. 사람들이 쉬운 지식만 쫓으면 철학은 상투적으로 타락한다. 유행처럼 거리의 쉬운 철학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면 몸의 균형이 무너지듯 쉬운지식만을 고집하면 정신은 스펀지처럼 푸석해진다. 궁극의 사유일수록 난해한 절망에 직면하며 그 절망을 절절히 표현할 근성을 갖추고 있다. 쉬운것은 심오할 수 없다. 절망에 직면하고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라는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춰지는 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려 그 외곡되고, 낯선 모습을 들추어 내는 관점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자의나 폭력도 없이 전적으로 대상과의 교감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 사유의 유일한 관심사이다.
가능성을 위해 사유는 자신의 불가능성을 파악해야만 한다. 이 불가능성은 우리가 아직 인식하지 못한 곳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려 낯설게 하는 난제다. 이는 결코 쉬운문제가 아니며, 쉬운 일이 아니기에 쉽게 표현될 수 없다. 위대한 철학이 복잡하고, 빼어난 예술이 난해한 이유다. 지적허영이 조작해낸 난해함과 진정성이 창조해낸 복잡함에 대한 구분이 우리가 가진 공부의 덕임을 감안할 때 훌륭한 철학을 생산하는 철학자들을 향해 우리가 품어야 할 태도는 푸념이 아니라 응원은 아니겠는가. 절망에 직면한 사회를 더 날카롭게 분석해 달라는 요구에 독자로써 절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복잡한 지식의 탈해들을 한올한올 풀어 읽어가며 자발없는 우리의 삶을 편견없이 구축해야하지 않겠는가. 난해한 철학이 대중의 박수를 받지 않는다해도 포기될 수는 없다. 니체가 그동안 홀대 받았던 이유도 이와 같았고, 피의 글은 독자 편에 서지 않기 때문이며, 도래할 세상이 어김없이 난해할 것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직관적이고, 독창적이 철학을 믿기보다 땀을 뻘뻘 흘려 구축해낸 숙성과 인내의 철학을 사랑한다. 두팔 벌려 하늘과 닿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발목은 튼튼해야한다. 도약은 비약이다. 조급함은 우리를 편안한 것들로 유혹한다. 그러나 허물어지지는 말자. 저 높은 곳을 고투하는 산악인이 감동스러운 것 처럼 우리도 우리의 손과 발로 우뚝 서고, 더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수 있다. 제 아무리 어렵다 해도 그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인간이니 철학이 난해하더라도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말 할수는 없다. 편견의 퇴거는 결코 쉬울 수 없기에 날카로운 몰입의 강도가 연마되어야 될 것이다. 양 팔 벌려 찬란한 불꽃의 세계를 찬양하며, 피를 끓여 감각을 세미하게 열어 젓히는 것이다.
- <니체처럼> 이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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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가끔 단순함을 미덕으로 여길때가 있다. 그럴듯하다. 'Simple is best.'를 최고의 슬로건이라 칭하며, 점차 미니멀을 찬양하는 트랜드를 보면 단순함의 매력은 상당해 보인다. 더군다나 편리와 가성비만을 추구하는 분위기속에서 단순함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한때 유행이였던 욜로, 플랙스라는 구호가 그러했고 그 반대편의 '경제적 자유', '부자' 또한 그러했다. 결과가 단순하다고 해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까지 단순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복잡하고 치열한 과정은 무책임하게 생략한채 영상으로, 책 몇권으로 편리하고 단편적인 결과만을 취하려 하기에 허무함과 패배감만이 남는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문제들이 단순함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단편함으로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변화 할 수도 없다.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하다. 물론 이 세상의 복잡계를 개인이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복잡함을 용기있게 탐구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단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취향이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의식주는 물론 대화 주제까지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을 일방적으로 늘어놓거나 자신과 타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평가하며 늘어 놓는, 혹은 물물거래하듯한 천편일률적인 소통들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대인은 어쩔 수 없다. 사회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천편일률적고, 사유하지 않는 단순한 기준을 강요 받고 있다. 사유의 불능은 문명사회가 힘들게 이뤄 온 휴머니즘을 훼손시킨다.
나도 모르게 내 주변의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고, 편리와 합리를 핑계 삼아 진정으로 봐야할 것을 회피하며 살고 있는게 아닌지 의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