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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VS 의심

by 이주낙

믿음을 단순히 마음이나 정서적 기능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믿음이야 말로 인류의 변화를 이끈 원동력이다. 사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들 중 사실 없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일 뿐, 인간의 언어와 기존 관념을 배제하고 생각한다면 어둠이라는 현상은 실존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언어적, 관념적으로 만든 개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냉기'도 열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엄밀히 보면 실존하지 않는다. 어둠과 냉기처럼 신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약속을 할 수 있게 하고, 집단 지성으로 집단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종교, 이데올로기, 국가, 법률, 돈과 같이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들 또한 없는 것을 서로 있다고 여기는 것, 즉 믿음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필연적으로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반면,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의심하는 능력 또한 인류의 또 다른 국면을 가져왔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류는 절대적이라고 믿어왔던 신으로 인해 결집하고 발전을 도모했다. 하지만 반대로 신을 의심하고, 신이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인간 스스로 독립할 수 있게 됐다. 신을 비롯한 기존의 믿음을 의심하여 깨버림으로써 인간 스스로를 책임지게 되고, 인간과 세상에 대해 수없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문명의 시야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고, 수많은 가능성과 자유가 펼쳐진다. 철학과 같은 형이상학부터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은 의심을 원동력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처럼 믿음과 의심은 둘 다 우리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중요한 능력이다.(믿음은 감정의 능력이고, 의심의 이성의 능력이다.) 사회가 앓고 있는 부조리와 문제들이 어쩌면 각 구성원들 간의 믿음이 퇴색돼서 생기는 문제들이 대다수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의심이 사라진다면 부조리나 문제를 인식을 하지 못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사회가 아닌 개인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확장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심은 어느 하나 저버릴 수 없는 능력이다. 어찌보면 의심과 믿음은 상충되는 것 같지만, 음과 양처럼 불가결한 관계이다. 의심으로부터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으로부터 새로운 의심이 생겨난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는 엄마 좋아 아빠 좋아와 비슷한 강요같다. 즉 다시 말해 이원론적 오류를 강요하는 질문인 것이다. 엄마가 조금 더 좋을 수도, 아빠가 조금 더 좋을 수도, 둘다 똑같이 좋을수도, 혹은 아침엔 엄마, 저녁엔 아빠, 점심엔 엄마가 51% 더,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샐수 없는 스펙트럼속인데, 그 속에서 절대적인 카테고리를 강요하는 질문이다. 흑백의 중간엔 수많은 회색지대가 존재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믿어야 할 것과 의심해야 할 것을 때에 따라 적절히 구분하는 태도, 중용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중용을 '뭐든지 중간으로'로 오해할 수 있는데, 중간보다는 쉽게 말해 캐바캐, 그때그때의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중용은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나 유가의 중용이나 불교의 중용이나 결국 변화 속에서 '적절함'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시야를 움직이라고 하는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지혜라는 것은 '캐바캐', 믿음과 의심 사이를 하나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회색의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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