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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와 공

<불교를 철학하다> 이진경 저

by 이주낙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유명하신 이진경 교수님의 불교 입문서 <불교를 철학하다>의 초반부를 참고하여 불교의 주요 개념을 정리해봤습니다.


흔히 오늘날 불교를 고통의 비관주의 철학으로 알고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초기 불교의 Dukka에 대한 번역오류 때문입니다. 산스크리트어 Dukka를 중국에서 苦(고통, 괴로움)라고 번역 한 것이 보편적인 해석으로 용인되면서 고통의 종교 혹은 철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 온 것이죠. 그렇다면 Dukka를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일까요? Dukka는 '어긋남' 즉, 나의 의지와 모든 것이 어긋나는 한계상황, 좀 넓은 의미로 '차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는 왜 발생할까요? 그 원인은 연기(緣起)로 볼 수 있는데, 연기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 이것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현상은 독립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고, '조건'지어져 있다는 원리입니다. 지금 제가 앉고 있는 의자는 '내'가 앉아있기 때문에, 저의 '앉는 행위'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또, 의자라고 부르고 있는 '말'로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에 의자라고 하는 것 입니다. 어떤 의자는 앉는 용도가 아닌 감상 도구로 활용 한다면 의자가 아닌 감상품인 것죠. 이러한 '상태'의 조건에 따라 의자는 변합니다. 그리고 의자를 만들기 위한 원재료가 먼저 존재하고, 의자를 탄생 시키기위한 누군가의 노동이란 조건으로 인해 의자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몇 만년 후에 미래에 의자가 부식되버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면, 반대로 의자가 만들어지기 전 의자를 구성하고 있던 재료들은 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까요? 이러한 시간과 '과정'의 조건에 따라 의자는 끊임 없이 변화 합니다. 뭐 의자 뿐이겠습니까? 조건과 원인에 의해 삼라만상은 매찰라마다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상은 없는 것(공空)과 다름 없습니다. 고정된 실체(상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무상無常), 그리고 '나'라는 존재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무아無我) . 정말 신기하게도 실재로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새포들은 매순간 죽고 살아나서 6개월이되면 완전히 다른 세포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원리인 '무상'과 고정된 나는 없다는 '무아'를 깨닳을때, 비로소 공(空)이라는 모든 것이 비어있는 실상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공(空)이란 우리 경험의 모든 것, 우리 자신, 우리의 소유물, 관계는 모두 끊임없이 유동하며, 영구적인 본질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결국 세상에 남아 있는 실상이라곤 각 '상'들 간의 [Representation(표상), Appearance(현상), Object(대상),Imagination(상상), Impression(인상), Illusion(가상), Ideal(이상)] '차이'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 무의식적으로 상태와 과정으로 인한 차이는 보지 못한채, 한 가지 상의 동일성만을 바라보니 어긋남이 발생합니다. 흔한 예로 형이상학 같은 문제들, 사랑, 인간관계, 일, 철학, 종교, 윤리에서 나타나는 A는 B다. 혹은 B여야만 한다는 인위적인 동일성 추구 때문에 끊임 없이 어긋남이 발생하죠. 저 사람은 이래야되는데, 이러지 않아서 괴롭고, 내가 이렇게 하면 이래야 되는데, 이러지 않고, 저래서 괴롭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와 관념의 경제성때문에 수많은 종류의 벚꽃잎을 똑같은 벚꽃잎이라고 부르고, 수많은 종류의 꽃을 단일 개념인 꽃이라고 하며, 전 지구의 60억 인구의 사람들을 그냥 사람이라고, 5000만 인구의 한국인을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념 같이 단일 개념으로 바라볼 때 있는 그대로 모습, '어긋남'과 '차이'를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발생합니다.


무지에 빠진 혹자는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매순간 매상황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사사건건 따져가면서 다 다르게 여기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 갑니까? 맞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극단적인 상대주의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들릴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 재해와 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 매번 차이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렇게 되면 위협적인 재해 등은 인간에게 매번 정보가 새롭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인식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대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만 존재한다면 일정한 체계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동일성을 발현 시키는 무지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인간에게 매우 유용함을 선사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무지한 지식을 진리로만 바라보게되면 무용할 뿐아니라 유해한 지식이되기는 하죠.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불교의 핵심적인 메세지는 모든 삶과 세계에서 동일성(허상)을 추구해야하는 필연적인 한계는 존재하며, 이 한계에 가려진 차이를 보자는 것이고, 이 차이를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를 알아 차리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지를 깨고 나갈 수 있는 확장의 메세지, 차이에서 발생하는 다양성을 긍정하고, 동일성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동일성의 무지로 닫힌 가능성을 열어주는 힘과 그로 인한 생성을 촉구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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