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몇 단톡방에 있으면 정치 이야기로 하루가 다 채워지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는 새벽부터 기사나 유튜브 링크를 올리고, 누군가는 그걸 받아 욕을 덧붙인다. 생산적이진 않더라도 흥미롭거나 이성적인, 이해와 타협점을 향하는 정치 얘기를 한다기보다는 분노를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듣는 입장에서는 술 취한 사람의 푸념과 분노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는 기분이 든다.
이런 풍경은 단톡방만의 일이 아니다. 인터넷 기사 댓글이나 유튜브 영상의 리플, 심지어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모임 자리까지도 서로에 대한 대화보다 엉뚱한 양쪽으로 갈라지기도한다. 때로 세대 갈등으로 흘러가거나, 요즘 남자들은, 여자들은, 하며 젠더 갈등으로 옮겨간다. 자영업자와 회사원,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조금 더 넓게 보면, 정치·세대·젠더·지역·계층 같은 거의 모든 주제가 결국 갈등 구도로 흘러들어간다.
그 배경에는 구조적인 면도 있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법조인 출신들이 많다. 법정에서는 유죄냐 무죄냐, 맞냐 틀리냐로만 결론을 내야 하니 애초에 중간지대가 없다. 이런 사고방식은 사회 문제를 다룰 때도 그대로 이어진다. 타협이나 절충은 힘을 잃고, 결국 ‘우리 편’과 ‘저쪽 편’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포장된다. 정치인 스스로도 진짜로 그렇게 믿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연기하는지, 자기기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흑백으로만 나뉜 사회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각인된다.
미디어는 이런 구도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합의나 협력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지만, 싸움은 언제나 흥행 보장이다. 2030세대 vs 4050세대, mz세대, 베이비붐 누가 얼마 벌었고, 교묘하게 편집한 "누가 무슨 말을 했다더라" 같은 제목은 사람들의 클릭을 끌어내고, 댓글 전쟁은 사이트 체류 시간을 늘린다. 갈등이야말로 미디어가 팔아먹기 가장 좋은 상품이다.
대중은 이 상품을 단순히 정보가 아니라 정체성 확인으로 소비한다. 반대편의 실수나 말실수를 보면서 역시 저쪽은 틀렸다고 확인하고, 그 순간 소속감이 강화된다. 친구들과 기사를 공유하며 함께 욕을 하고, 온라인에서 댓글을 달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한다.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옳으냐보다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가 된다. 자유를 외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파시스트를 자처하고 있는 샘이다.
이들이 계속 새로운 분노를 찾아 해매는 모습은 술 취한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과 닮았다. 본인은 분이 풀리는 것 같아도, 그 분노는 계속해서 공유되고 눈덩이 처럼 불어 더 큰 분노를 낳는다. 그리고 그 감정에 취하는 것은 술과 매운음식처럼 매우 중독적이여서 끊을 수 없다. 그 옆에서 그것들을 강요당하는 맨정신의 맵찔이들은 매우 괴롭다.
이런 반복이 쌓이면 사회적 비용이 커진다. 복잡한 문제는 단순화되고, 다양한 해법은 사라진다. 합의는 배신으로, 협력은 야합으로 취급된다. 결국 남는 건 서로의 피로감뿐이다.
이 흐름을 끊기는 쉽지 않다. 미디어는 여전히 갈등을 팔아야 살아남고, 사람들은 여전히 분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분노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 이제라도 정치 얘기를 멈추고, 세대나 성별 탓을 덜 하면서, 일상의 다른 얘기들을 나누는 습관이 필요해보인다. 정치가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 하루의 일상 그리고 삶 전체로 봤을 때 상관 없는 부분도 많다. 실제 삶은 훨씬 더 복잡하면서 단순하기에 나만 잘하면 되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갈등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듯, 분노도 우리의 유일한 에너지원이 될 수는 없다. 사회가 조금은 덜 피곤해지려면, 우리가 소비하는 분노의 양부터 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