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으로 인한 타인과의 단절
내가 어릴 때는 밤 9시~10시쯤, 리모컨을 돌리면 허준, 장금이, 올인, 개콘이 나왔고, 온 가족이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선 어제 봤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공감은 거대했고, 단순했으며, 무엇보다 동시적이었다.
그 시대의 공감은 같은 시간, 같은 장면을 매개로 생겼다. 그 안엔 개인의 차이를 덮는 힘이 있었고, 대신 공동체의 리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달라보인다.
넷플릭스, 유튜브, 인스타
모두 각자의 시간과 취향에 맞춰 자신만의 스크린을 커스텀한다.
이제 어제 봤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공감의 파이는 작아졌지만, 결은 훨씬 다양해졌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리좀은 중심 없는 확산의 구조다. 한 줄기로 뻗지 않고 땅속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식물의 뿌리처럼, 공감도 이제 그런 형태를 띤다.
예전엔 국민드라마 하나가 감정을 모았다면,
이제는 수 많은 컨텐츠가 각자의 방향으로 감정을 퍼뜨린다. 공감은 하나의 중심이 아닌, 수많은 연결의 점들로 존재한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지만, 서로 다른 타임라인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공감은 공간을 떠나, 디지털 상의 감정 네트워크로 이주했다. 모임, 커뮤니티, 댓글창, 라이브 스트리밍 채팅방은 모두 새로운 형태의 광장이다.
그곳에서는 거창한 담론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라는 작은 안도가 더 중요한 공감의 단위가 된다.
하지만 정말 이 것들이 공감일까?
리좀의 토양은 넓어졌지만, 그 토양은 여전히 알고리즘이라는 좁은 틀안에 담겨있는 화분같다.
각자의 취향처럼 보이지만, 결국 비슷한 콘텐츠를 보고 비슷한 감정선에 머문다.
아도르노가 말한 이성의 도구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합리적 선택이라 믿지만, 사실은 시스템이 정한 효율적 감정의 동선 위에서 움직인다. 그 안에서 우리의 감정은 계산되고, 분류되고, 추천된다.
이렇게 나에게 맞는 것만 보며, 나와 비슷한 사람만 마주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날 기회를 잃어간다.
불편한 의견, 낯선 시선, 이질적인 세계를 피하게 되고
결국 확장하지 못하는 공감의 회로 안에 머무른다.
다양성은 점점 사라지고, 감정의 범위도 좁아진다.
공감이 깊어지는 대신, 닮은 사람끼리의 공감만 반복되는 폐쇄적 친밀감으로 변한다.
지금의 개인은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점점 더 고립된다.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정작 서로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공감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타인을 만날 가능성은 줄어드는 세계. 우리는 각자 다른 방에 갖혀 있으면서, 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