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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23. 2021

음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히구치 이치요, 『키 재기 외』(을유문화사)

  일본 근대 소설을 읽을 때마다 특별하게 휘감겨 오는 시대의 분위기가 있다. 당시에 살롱이기도 했던 유곽과 흥성거리는 유곽 거리, 사교계의 풍류, 고뇌하는 남성의 (비대한) 예술적 자아, 이루지 못하는 남녀의 사랑과 동반 자살, 생활비는 갖다주지 않으면서 밖으로만 떠도는 남편과 그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아내, 어긋나는 인연, 그리고 지독한 가난의 풍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같은 소재와 배경이되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들은 어딘지 다르다.  

    

  가파르고 녹록하지 않은 일상을 사는 인물들에게 내재된 혹은 그들을 둘러싼 아름다움, 견디며 사는 인물들의 출구 없는 고민들, 특히나 노동과 계급, 가난 등의 사회 문제를 포착하는 시선이 동시대 작가들과 조금은 다른 위치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빈곤의 한 가운데서 평생을 살았던 터라 표현이나 상황, 배경 자체가 추상적이지 않다. 1872년에 출생하여 24살에 생을 달리한 메이지 시대의 작가 히구치 이치요.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등이 이후의 작가이지만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지 않은 여성 작가다.  

    

  히구치 이치요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건 2004년 일본의 새 지폐 디자인 인물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일본 최초로 여성이 지폐 인물로 올라간 것과 그가 요절한 작가라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현재 오천 엔 지폐 속의 인물이 생전 빈곤으로 힘들게 살았고 글을 쓰면서 생계를 꾸려 간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사후의 이런 영광(지폐 속에 박제되는 인물이라니)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실제 삶도, 작가가 그려 낸 작품 속 인물들도 당시 빠르게 변화하던 시대의 끄트머리에서 겨우 부스러기만을 주우며 살 수 있었을 뿐이다.


  메이지 시대 출발(1867) 이후 태어났지만 에도 시대 막바지 신분 상승의 막차를 잘못 잡아타고 몰락한 아버지를 대신해 히구치는 성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집안 생계를 책임지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소설을 쓰게 된 계기도 원고가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데, 데뷔한 지 불과 4년 만에 폐결핵 악화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 죽음에도 가난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종종 요절한 예술가를 두고 천재라 칭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개개인의 삶과 죽음엔 각각의 이야기와 결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편한 단어로 쉽게 규정하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계를 꾸리며 치열하게 썼던 이를 두고 ‘천재 여성’ 작가 운운하는 평들은 아무래도 어딘가 불편하다. 예술가의 가난 또한 낭만화하지 말아야 한다. 가난 속에서 꽃 피워낸 예술성 천재성 운운할 시간에 실질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겠다. 


  을유 세계 문학 전집으로 나온 히구치의 작품집은 <키 재기>를 포함하여 그의 대표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다. 판본 소개를 참고하면 작품 배열 순서는 발표 순서다. 모든 작품을 뜻깊게 읽었지만, 특히 첫 번째 수록작인 <섣달그믐>을 읽고 나선 이 작가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노동이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사회 소설로 탁월한 위치에 오를 수 있지 않았겠나 싶은 마음에 더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랬더라면 지금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은 ‘초기작’으로 분류하고 작가의 변화와 성장도 시대순으로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만. 

    

  소설집 전반의 분위기는 단조(短調, minor)다. 형언하기 힘든 비애가 읽는 쪽의 내면을 무척이나 쓸쓸하게 만든다. 작품 속 인물들의 안녕도 궁금하거니와 남루한 세계 속에서도 높은 곳에 자신을 두었던 사람의 성정과 글을 쓰며 생계를 이어가던 근대 여성의 결락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작가가 남긴 일기가 있으나 현재는 절판 상태다. 재발간 작업을 기다려 본다.     


           

20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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