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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23. 2021

순간의 영원, 영원의 순간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To the Lighthouse)

  안개 가득한 바다 위 배가 한 척 있고 우리는 그 배에 실려 있다. 사방에 또렷한 것은 없는데 저기 시야가 닿는 곳에 등대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때로 거센 파도 때문에 배가 뒤집어질 것처럼 출렁이고 누군가는 그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배는 계속 흔들리며 나아가고 눈앞에 보이는 등대로는 어쩐지 가닿지를 못한다. 배는 어디로 가는가. 이 안개는 언제쯤 걷힐 것인가. 이것은 은유일까?      


  1927년 출간된 『등대로』는 여덟 명의 자식이 있는 램지 부부와 몇몇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로『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전기를 보여주는 이야기는 많지만, 이 소설의 전개는 일반 서사가 채택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화자도 수시로 바뀌어 한 소설 안에서 여러 사람의 내면이 다층적으로 소리를 내고 있으며 긴 세월을 다루고 있음에도 지극히 정적이다. 굵직한 일들은 시간에 의해 풍화된 모습으로만 잠시 비추고 넘어간다. 중간에 전쟁이 있고 몇몇 인물이 죽는 변화가 있지만 그러한 큰 변화는 브릿지 형식으로 다루고 대개 일상의 소소한 순간으로 인물을 드러내 보여주는데 그마저도 내면의 서술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충의 윤곽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일상의 우리가 타인과 사물,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서술로 독자가 접할 수 있는 건 삶과 예술에 관한 시적이고도 예리한 사유의 편린들이다. ‘도대체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다들 그렇게 밀봉되어 있는데?’(71, 열린책들)

   우리가 무언가를/누군가를 ‘안다’라고 했을 때 그 앎의 내용은 대체로 내가 인식하는 몇몇 정보값으로만 재조직한 편협의 결과물이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맞은편 만에서 바라보았던 등대라는 것은 헐벗은 바위 위의 삭막한 탑일 뿐‘(266) 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것이 원래 등대의 본질인 것.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해를 일삼는 게 인간이며 대체로 본질은 놔두고 본질을 둘러싼 것과 피상적 사실만으로 안다고 여기므로 우리가 또렷하게 딛고 있다 여기는 세계나 ‘밀봉되어’ 있는 타자(他者)는 영영 닿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이쪽에서 발화된 말들은 언제나 ‘떨리며 빗나가 과녁에서 몇 인치쯤 처진 곳에 박혀 버’(234) 릴 뿐 아닌가.     


  내 인생이 언제 봄날의 꽃처럼 사방천지 화르르 피어날지 눈부신 순간은 언제 맞을 수 있을지 때로 궁금하지만 그런 순간은 사는 내내 없을 거라는 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삶의 진실일 지도 모른다. 순간이 가지는 영속성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위대한 계시는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들, 어둠 속에 뜻하지 않게 켜지는 성냥불처럼 반짝하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212)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절대로’와 ‘영원히’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영원한 사랑, 변함없는 우정,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맹세 따위들. 영원은 순간 속에 있다. 현재는 과거의 집적이며 미래의 원인이므로 지금을 정하게 사유하고 단단하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순간이고 영원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 곳곳이 빛나지만 릴리 브리스코가 지난한 시간 끝에 마침내 붓을 들어 강렬한 한순간을 선으로 긋는 마지막 대목은 용기와 생명력의 환희로 기억된다. ‘아마 다락방에나 걸리겠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없애 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274)

  5월 5일은 『등대로』가 출간된 지 정확히 93년이 되는 날이다. 이 소설을 등대 삼게 해 준 버지니아 울프에게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보낸다.          



20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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