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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23. 2021

자유로부터의 비자발적 도피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민음사)

  일 년에 겨울이 6개월인 뉴잉글랜드 황량한 지역 스탁필드에 사는 이선 프롬은 오랜 병으로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내 지나 프롬과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갈 곳이 없는 아내의 먼 친척 매티 실버와 살고 있다. 아픈 어머니를 오래 돌봐주었던 집안 사촌과 물 흐르듯 결혼까지 하게 되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이선에게 일 년 전부터 함께 살게 된 매티는 그의 생활에 작은 활력이 되어 준다. 밋밋하고 변화 없는 일상에 화사한 색이 덧입혀지고 엷게나마 볼륨감이 생긴 건 목재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거기 매티가 있기 때문이다. 매티와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 이선의 일상엔 온기가 돈다. 어느 하루 집을 비우고 새로운 의사를 만나고 온 아내는 일머리가 서툰 매티를 내보내고 자기를 돌보며 야무지게 집안일을 해줄 새로운 여자아이를 데려와야겠다고 통보한다. 매티에 대한 이선의 마음을 알아챈 아내가 취한 나름의 조치다. 그래, 모를 수가 없지. 사랑이 스민 얼굴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을 어떻게 감추나. 매티가 쫓겨난다. 알고 보니 매티도 그를 남몰래 속에 두고 있었다. 이제 이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선 프롬은 어렸을 때부터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대학에서 일 년간 공부하며 실험실에서 일한 적도 있다. 여기가 아닌 더 큰 곳으로 나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를 돌봐주던 지나와 결혼하는 수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기에 품을 수 있었던 포부였다. 아니 그건 포부랄 것도 없이 젊음 만이 펼쳐져 있고, 아직 크고 작은 몇 번의 실패라는 것이 서서히 인간을 무릎 꿇리고 있다는 걸 모를 나이 때 당연히 꼽아볼 수 있는 삶의 여러 가능성 중 하나였을 것이다.    

  

  봄날 꽃이 피어나듯 여기저기서 툭툭 발현되는 가능성의 한 가운데 서 있으면 예비된 미래의 포지션 또한 그렇게 순조롭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젊은 날엔 미래가 얼핏 스쳐 가듯 보일 때가 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증명이 불가하지만, 그래서 헛것이라 여기고 머리 흔들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돌아보면 그건 어쩜 가지 않은/못한 길이 찰나에 보여준 미래의 스냅 사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마음이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없다. 그런 사실을 체득하고 난 뒤에는 어떤 가능성의 시기로부터 이미 너무 멀어져 있다.    

  

  아내를 다그쳐보기도 하고 새로 온 여자아이와 매티가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도 하고 아내를 놔두고 매티와 떠나버릴까 생각도 하지만 목재 일을 하며 겨우 먹고 사는 이선에겐 매티와 떠날 차비조차 없다. 병든 아내를 버리고 떠날 만큼의 매정함도, 매티를 보내지 말라고 애원할 용기도 없다. 오직 사랑만 있다. 있는 건 그뿐이다. 그러나, 고작 그것으로 무얼 하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는 자신과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 킨케이드의 손을 끝내 잡을 수 없다. 남편의 차에서 문만 열고 나가면 곧장 킨케이드에게로 달려갈 수 있지만, 운전석에서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 남편은 내면이 요동치는 아내의 절망을 알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악셀을 밟고 프란체스카는 속으로 오열을 하며 뜨겁게 잡고 있던 문손잡이를 놓아버린다. 불과 얼마 전, 남편과 아이들이 소 품평회가 있는 박람회 참여를 위해 며칠 집을 비우게 되었을 때 그날 저녁 테라스에서 프란체스카가 가운을 펼쳐 맨 살갗으로 맞는 바람은 자유였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선 프롬』 또한 사랑에 대한 포커스보다 왜 한 사람의 눈부신 자유 의지가 사회와 인습의 굴레에 꺾이고 다시 원치 않는 일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게 환기된 질문 속을 배회하게 했다. 『이선 프롬』은 1920년 『순수의 시대』로 여성 최초의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 이디스 워튼의 자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202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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