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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Sangwoo Kim Oct 14. 2015

(5) 어차피 처음부터 행복은 나랑 어울리지 않았다

파란만장 뉴욕 이민 이야기(5)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락함 이었다. 비록 새엄마지만 처음으로 아빠와 엄마가 모두 있는 가정이 생겼다. 새엄마는 나에게 잘해주셨다. 아빠와의 앙금이 다 풀리지 않아서인지 나는 아빠보다 새엄마를 더 따르고 의지했다. 많은 이민자들의 생활이 그렇듯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만족하며 살았다. 새엄마는 네일가게를 했고 아빠는 꽃가게를 하셨다. 두분다 아침 일찍 나가서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셨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혼자 있는 것 에는 어릴 때부터 이골이 나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족 외식을 했는데 외식이라고 해봤자 온 가족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맥도널드 같은 페스트 푸드 점에 가서 햄버거를 먹는 게 고작이었지만 난 그게 너무 행복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참 좋았다. 학교생활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꼴통학교에서 중상위권을 유지하는 건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열심히 알바를 한 덕분에 가난한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는 목에 힘 좀 주는 재력가가 되었다. (물론 같이 모였을 때 빵이나  한 번씩 사주는 수준이었지만..)

 

새 이름도 생겼다. Alex Kim. 영어를 못하는 부모님은 새엄마가 다니시는 네일가게 손님에게 도움을 청해서 제일 미국스러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Alex는 남미 사람들이 엄청 많이 쓰는 이름이다.) 대학교에서도 진학을 했다. 형편상 원하던  NYU는 지원을 포기했지만 상위권 뉴욕 주립대 4군데에 지원해서 모두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운이 좋았다. 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미국에 와서 대학씩이나 들어가다니..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인지.. 아니면 너무 바닥에 있어서 이제는 기쁜 일만 남았는지.. 참 작은 것에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엄마가 어딘가에서 점을 봤는데 난 초년에 고생을 엄청 많이 한다고 했단다. 그런 건 별로 믿지 않았었는데 확실히 그 무당인지 점술가인지는 영험했던 모양 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미국에 와서 고생한 게 성에 차지 않았었는지 내 운명은 또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새엄마와 아빠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새엄마는 아빠와 헤어지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날 짐을 모두 싸서 떠나버렸다. 미국 와서 아빠보다 더 의지하던 새엄마였다. 아빠와의 앙금이 조금이라도 풀리게 해 준 새엄마 였는데 청천 병력 같은 소리였다. 국민학교 때 엄마 서랍 속에서 이혼 서류를 찾았을 때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나에게 역시 평범한 가정은 사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운명 같았다. 내가 아빠 아들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당시 두 분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몰랐다. 누구 잘못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이로서  명확해졌다. 엄마도 그렇고 새엄마도 그렇고 아빠라는 사람은 뭔가 이상한 사람이 분명했다. 맨날 자기만 맞다고 우기는 고집불통에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모든 책임은 아빠에게 있었다. 아빠에 대한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 끝이다. 더 이상 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집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애들도 아니고 아빠 몰래 가출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아빠에게 지는 거 같아서 싫었다. 먼저 돈을 모았다. 알바도 저녁 알바, 주말 알바를 뛰었다. 계산해 보니 그럭저럭 생활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에 방 하나 짜리 월세를 얻었다.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룸메이트를 찾아 방을 쓰게 하고 나는 마루에서 생활을 하기로 했다. 방을 구한 후 아빠에게 가서 말했다. 더 이상 아빠랑은 살고 싶지 않다고.. 나가서 살겠다고.. 더 이상 나한테 연락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화를 내지도 않으셨다. 그냥 정적이 한참 동안 흘렀다. 인사도 하지 않고 뒤돌아서 나왔다. 그러고서는 몇 년간 아빠를 만나지 않았다.


혼자 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하방은 습하고 자고 일어나면 몸이 뻐근했다. 돈벌레 같이 다리가 수십 개 달린 벌레가 많이 돌아다녔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다. 자다가 뭔가 쓱 지나가는 느낌에 잠을 깬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룸메이트는 미국에 어학연수를 하러 와 있었다. 어떤 매력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매일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어학연수를 같이 다니는 한국 여학생 들이었다. 매일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지르며  SEX를 했다.  곤혹이었다. 몇 번 경고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당장 룸메이트가 나가버리면 월세가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꾹 참고 살았다.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슈퍼마켓에서 알바를 뛰었다. 주말에는 당구장에서 일을 했다. 두개다 밤에 일하는 거였는데 밤일이 낮 일보다 시급이 좋았다. 당구장에는 밤에 손님도 많이 없어서 밀린 과제들을 할 수도 있었다. 그 동네는 우범 지대였는데 밤에 총기사고도 많이 나고 싸움도 많이 나는 곳이었다. 새벽에 길거리 창녀들이 마약에 취해 들어와 화장실에서 토를 하고 쓰러지기도 많이 했다. 처음엔 무섭고 겁이 났었는데 시간이 계속 지나다 보니 별것 없었다. 까짓 거 죽는 것도 안 무서웠다. 시간이 많이 남고 돈도 많이 주니 최고의 알바였다. 문제는 낮과 밤이 바뀌다 보니까 하루 종일 멍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젊어서 버텼던 것 같다. 참 치열하게 살았었다.


그래도 아빠와는 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이 고생을 하는 게 백배 마음 편했다. 아빠에게 손 안 벌리고 혼자 학비까지 벌어서 사는 내가 나름 뿌듯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슬플 것도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행복 같은 건 나랑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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