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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Sangwoo Kim Oct 10. 2015

 (4) 뉴욕에서 살아가다. 아니.. 살아남다

파란만장 뉴욕이민 이야기(4)

내가 상상하던 뉴욕은 이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을 텐데..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범죄자 같다. 넓은 정원은? 금발의 이웃은? 널따란 운동장이 달린 고등학교는? 그런 건 없었다. 이곳엔 나처럼 이곳이 고향이 아닌 중국인, 한국인, 맥시코인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다들 말도 안 통하는 이 먼곳까지 날아온 이유가 있으리라. 그들의 얼굴에는 삶이 찌들어 있었다.


뉴욕에 온후 며칠 되지 않아서 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한국에서 중학교 졸업을 하고 바로 미국에 올 줄 알았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었는데 입국허가가 1년이나 늦어지는 바람에 1년 동안 백수생활을 했었다. 하는 일 없이 1년을 놀고 나니 학교가 너무 가고 싶었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기대감이 더 컸었다. 처음 들어가서 영어와 수학 두 가지 과목으로 입학 테스트를 보았다. 영어는 당연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 수학은 놀라우리만큼 쉬웠다. 고등학교 수학시험인데 한국 중학교 1학년 수준의 문제 들이었다. 미국 놈들 참 띨띨하네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든다.


미국 고등학교는 한국의 대학교 시스템 같이 본인이 듣고 싶은 수업으로 시간표를 짜고 강의실을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손에는 시간표가 들려있었지만 외계어가 쓰여있었고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학생들 중 가장 착하게 생긴 (덜 무섭게 생긴) 여학생을 붙들고 다짜고짜 시간표를 내밀었다. 말 못하는 벙어리처럼 모르는 사람에게 시간표를 들이밀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시간표에 쓰여있는 'G', 'Y', 'M'이라는 단어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그게 체육관  (GYM)이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이후론 다행히 수업시간마다 한국 학생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은 나를 다음 반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Newtown high school 은 사람들이 꼴통 중에  꼴통이라고 부르는 그런 학교였다. 학교의 대부분은 남미 계열 이민자로 학교에서는 영어보다 스페니쉬가 더 많이 들렸다. 수업 뒷자리에서는 담배인지 마리화나인지 모를 수상한 입사귀를 종이에 말고 있었고 선생님과 싸우고 뛰처 나가는 학생들, 선생님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아이들 등 영화 Freedom writers 의 실사판 이었다. 선생님들도 그런 아이들은 포기한 듯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한 간섭하지 않았다.



난 학교를 다니면서 강도를 세 번 당했다. 두 번은 학교 화장실 안에서 내가 얼굴을 못 보게 벽으로 밀어 붙이고서는 주머니에 있는걸 모두 털어 갔다. 나머지 한 번은 등굣길에 키가 엄청 작은 남미아이가 총을 꺼내더니 나에게 들이대고는 잠바와 가방을 벗으라고 했다. 지금 같아서는 두말없이 주었겠지만 그때는 미국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총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이 없어서 그 아이를 확밀어 넘어트리고는 도망을 갔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학교같이 않은 곳을 3년이나 다녔다. 그런데 전화위복 이었다. 워낙 동네가 험하다 보니 수업 일수만 채워도 점수가 잘 나왔다. 하나도 못 알아 듯지만 수업시간에 선생님만 초롱초롱하게 바라봐도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미국 명문고에 들어갔었다면 고등학교 들어가고 3년 만에 대학교를 진학할 수 있는 내신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하교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메신저라고 한국으로 치면 퀵서비스 같은 일이었는데 맨하탄 오피스에서 중요한 서류들을 다른 오피스로 배달하는  서비스였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일이었지만 맨하탄을 구석 구석 돌아다닐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아했던 일이었다. 뉴욕에 와서 맨하탄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세상에서 제일 높을 빌딩은 63 빌딩이었는데 맨하탄에는 63층이 넘는 아파트들이 수두룩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빌딩들의 높이에 머리가 지끈 아플  정도였다. 그런 빌딩들이 수없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은 경외로웠다. 그리고 아름 다웠다. 그런 곳을 매일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나에게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회사 트럭에 앉아서 길에서 산 핫 도그를 씹으며 Queensboro  bridge를 건널 때 본 노을 지는 맨하탄의 전경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다 범죄자들 같았던 이웃들은 그저 나와 같이 평번한 사람들 이었다. 지나가다 맨날 들르는 길거리 카밥(꼬치구이) 아저씨는 내가 가면 꼭 빵을 한 개씩 더 끼워 주었다. 더럽지만 월남국수가 엄청 싸고 맛있는 집도 알았고 처음엔 짜서 한입 먹고 버렸던 뉴욕의 피자가 입에 딱 맞게 되어 버렸다.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한국 짜장면을 파는 삼원각도 있었고 갈비를 파는 올림픽 가든도 있었다. 파크에 나가면 늘 같이 만나서 농구하던 아이들이 있었고 다 같이 가난했던 우리는 돈을 모아 3불짜리 gallon water (약 4리터 물) 사서 나눠 마셨다. 서로 호감이 있던 중국 여학생네 집에  전화해서 서로 말이 안 통하니 "I am your friend' 만 반복했던 기억도 있다. 참으로 오래간 만에 느껴보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트레스 받고 힘들다고 반항했을 만도 했는데 예전 엄마가 아플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너무나 행복한 일상이었다. 뉴욕은 천천히 나의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뉴욕에서 살고 있다. 아니.. 살아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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