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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Sangwoo Kim Nov 04. 2015

(12) 아빠가 되었다.

파란만장 뉴욕이민 이야기 (12)

양수가 터졌다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가보니 그녀는 그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었다. 나 혼자만 전쟁이 난 듯  허둥지둥했었고 그녀는 애 다섯 낳아본 아줌마 마냥 덤덤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엄마는 강하구나 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병원에 입원을 해서 그녀가 환자복을 갈아 입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이제 곧 내 아이를 만나겠구나..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는 건 엄마가 병원에서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었다.  엄마의 오랜 투병생활, 엄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서 나는 대학병원 같은 큰 병원에 들어서면 손발에 땀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 20년이 지나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아이를 낳고 며칠 병원에 있어야 한대서 진정제라도 가지고 가야 하나 걱정을 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내 어지러움증 같은걸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진통이 심해지자 의사가 들어와서 그녀의 허리에 검지 손가락만 한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걸 지켜보다 잘못했으면 기절할 뻔했다. 에피도르 라는 마취주사 였는데 바로 척추에 꽂는다고 했다.  그렇게 큰 바늘이 등을 쑤셨는데도 그녀는 주사를 맞고 나니 훨씬 살만하다며 농담까지 했다. 등에 그렇게 큰 바늘을 꽂고 아프다고 뒤척거릴 때마다 난 혹시 바늘이 척추를 상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식은땀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긴 게 그 와중에 나는 둘째는 죽어도 낳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었다. 


병원에만 가면 바로 애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참으로 길고 긴 진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들어와서 저녁이 되었는데도 아직은 분만할 준비가 안되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굶은 그녀를 두고 밥을 먹을 수도 없어서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눈치 없게도 내 배꼽시계는 칼같이 울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저녁이후에는 아무것도 못 먹었다. 장모님이 좀 쉬었다 오라며 잠깐 짬을 준사이에 잽싸게 식당으로 내려가 샌드위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씹는듯 마는듯 샌드위치를 꾸겨 넣고 올라가려다 문득 내가 참 치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황에도 배가 고픈 내가 참 싫었다. 


진통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드디어 분만을 한다고 분만실로 옮겼을 때가 이미 진통을 12시간 넘게 한 후였다. 분만을 옆에서 지켜본 건 나로서는 지금 후회하는 일이다. 엄마 다리사이로 아이의 머리가 보였을 때 난 반갑다는 생각보다 무섭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둘 중에 누구 하나라도 다치면 어쩌나 안절부절 불안했었다. 분만 역시 쉽지 않았다. 2-3시간을 분만했는데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반쯤 보였다가도 다시 들어가고 반쯤 보였다가 다시 들어가고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그녀는 지처서 더 이상 힘을 줄 수도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의사선생님이 아무래도 자연분만은 힘들것 같다며 포기하고 제왕절개를 하자고 했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르고 나를 처다 보았다. 초보 아빠인 나도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몰랐지만 나를 쳐다보고 의지하는 그녀를 보고 정신이 들었다.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많이 아래로 내려온 아이를 다시 위로 올렸다. 그녀는 그 순간이 끔찍하게 아펐다고 한다. 


제왕절개는 내가 같이 할 수 없었다. 나는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홀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 동안 고생한 그녀 생각이 갑자기 나면서 감정이 복 받혀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창피한 것도 모르고 수술실 앞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며 울고 있었다. 근데 더 창피하였던 건 그 울음 소리가 옆 수술실 아이였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눈물을 닦고 기다렸다. 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긴가민가 해서인지 아니면 이전에 너무 창피해서 였는지 눈물이 안 나왔다. 곧 이어 간호사가 조그만 핏덩이를 들고 나와서 나에게 안겨 주었다.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많은 못생긴 아이였다. 어쩜 이렇게 못생겼나 싶었다. 아이를 받아 들고 나니까 또 주책 맞게 눈물이 났다. 따듯했다. 내 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내 딸.. 그녀와 나의 피를 반반 가지고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 못생겨도 예쁜 내 딸이었다.


 아이는 다시 신생아 실로 가고 몇 시간 후에 회복실에 있던 그녀가 올라왔다. 17시간의 진통과 분만 후에 제왕절개까지 한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미안함이 몰려왔다. 저녁 때 나가서 샌드위치 먹은 게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미안했는지 모르겠다. 한참 후에 그녀가 몸을 좀 추스르고 나서 아이가 입원실로 왔다. 드디어 우리 가족 셋이 모였다. 

    

얼마 있다가 장인 장모님이 오셨다. 첫 손자인 아이를 보고 두 분은 너무 기뻐하셨다. 장인 어른은 아이의 사진을 찍고 또 찍으셨다. 여기저기 전화해서 손주가 생겼다며 자랑을 하셨다. 장인 장모님이 가신 후 아빠도 왔다. 아빠는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양복 입은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었다. 그날은 양복을 입고 오셨다.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꽃을 사들고 오셨다. 아직 앞도 잘 안 보이는 손녀지만 손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오신 것이었다.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이었다. 표현을 안 하고 늘 무뚝뚝한 아빠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때도 아빠가 나를 이런 눈으로 처다 보았을까? 나한테는 그렇게 웃어본적이 없던것 같던데.. 아니 어쩌면 내가 한번도 아빠 얼굴을 제대로 처다보지 않았을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살아계셨으면 아마 애들 버릇 나쁘게 만드는 극성 할머니였을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새 생명이 태어 났고 내가 아빠가 되었다. 

처음으로 내 목숨보다 중요한 존재가 세상에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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