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기

길을 묘사해 봐

by 시은

어떤 첫 수업에 교수님이 학생 몇 명을 골라서 던졌던 질문을 기억한다.


모두 다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업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오늘 걸어온 길을 묘사해 봐.


내가 간단하게 설명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이었으니 뭐라 말해도 딱히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질문인데 만족스러운 답을 했던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의 대답이 끝나고 교수님이 말했다. 공간을 잘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반드시 ‘어딘가’에 있고, 그 ‘어딘가’라는 공간도 글 쓰는 사람이 잘 만들어야, 사람도 그 안에 제대로 놓일 수 있다고, 잘 놀 수 있다고.


그때부터 주변을 둘러싼 공간들을 틈틈이 묘사하곤 했다. 언젠가는 그 습관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꼭 펜이나 노트북에 기록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틈틈이 이동하는 동안, 무얼 봤는데 어땠다, 이런 걸 머릿속에 연습장처럼 깔끔하게 적듯이 문장으로 완성해서 떠올려보곤 했다. 공간과 더불어 상황도 그렇게 저장해놓곤 했다. 문장화 시켜서.


천재가 아니라서 문장을 다시 떠올렸을 때 완전히 처음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저장하고 붙잡을 수 있는 습관을 그때 키운 것 같다.


가장 저 기억력을 잘 사용한 건, 친한 친구가 성급한 결혼을 했다가 이혼조정 중에 나에게 의견을 물어왔을 때였다.


결혼 전, 데이트 얘기만 들었을 때도 내가 헤어지라고 했던 남자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였지만, 결혼을 말리고 싶은 남자였다. 하지만, 몇 달 뒤 날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미 분위기가 막아봤자 소용없는 상황이라 못 말렸었다.


친구는 이혼만 안 하면 남편이 지키겠다고 하는 약속들을 나에게 들려주며 남편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사귈 때도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성격이었는데 들어보니 결혼해서도 잘 안 지켰던 남자였다. 한결같기는 한 스타일이었나 보다.


친구에게 10개월 사는 동안 그 친구가 나에게 털어놓았던 고민들을 열거해주며, 그거 다시 반복이라고 말해줬다.


그 친구가 잊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하나, 뭐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는 소소한 것까지 끄집어내서 다 말해줬다.


이런 건 남이 기억해서 말해줘야 하는 걸까. 어떻게든 좋은 점을 보려고 하는, 안 지킬 게 뻔히 보이는 약속을 믿고 싶어하는 친구에게, 그 남자는 못 고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그녀가 들려줬던 증거들을 말해줬다.


근거도 없는 꿈을 믿고 글을 쓰느라 방세도 제때 마련하지 못해 빌빌거리던 나한테 언제 받을지도 알 수 없던 돈을 빌려주며 절대 조급해하지 말라고 내 꿈을 응원해주던 속 깊은 친구였는데, 착하다고 인생 잘 풀리는 건 아닌 거, 그 말 진짜 맞나 보다.


저 얘기를 듣던 날 되게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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