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이렇게 유익하다
아빠는 나에게 져주는 걸 좋아했다. 포커 때는 몸으로 놀아주기 싫어서 져주신 거지만, 사실 씨름을 할 때도 항상 나에게 져주곤 하셨다.
나와 연년생인 동생이 씨름을 하면 거의 내가 졌다.
동생과 아빠가 씨름을 하면 아빠가 항상 이겼다.
아빠와 내가 씨름을 하면 내가 항상 이겼다. 그래서 나보고 우승이랬다.
아빠가 일부러 져주는 것 같았다. 아빠에게 일부러 져주는 거 자존심 상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물었다.
-아빠가 왜 너한테 일부러 져줘?
-나 기분 좋으라고. 아빠, 나한테 져놓고 우리 딸, 우승 이러면서 맨날 웃잖아.
아빠가 허허, 참 하며 말했다.
-아빠는 누구 기분 좋으라고 일부러 져주는 사람이 아니야. 씨름은 스포츠야. 스포츠에서 그런 게 어딨어.
친구들은 또 달랐다. 매우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 당시에는 몹시 기분이 안 좋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일들이 있는데, 죽을 때까지 극복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한테는 첫 성추행이 그랬다. 지금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뭐야, 이 병신은? 하고 잡아서 경찰서에 넘겨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은 또래 남자애가 내 뒤를 쫓아와서 갑자기 생식기를 꺼내서 막 흔들고 사라졌던 그날, 놀라서 도망갈 수 있기는커녕 한발자국도 못 움직였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우울해졌다.
고민 끝에 담임선생님한테 그런 일이 있었는데 교복이랑 명찰색을 봤다고 말했다. 명찰색에 따라 학년이 달랐다. 명찰에 있던 이름까지는 기억 못하지만, 며칠 안 되었으니 얼굴 보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학교에 말해서 처벌할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겠느냐고 여쭤봤다. 울면서.
담임선생님은 그 일을 잊으라고 했는데 내가 그 일로 입은 피해가 없는데 이런 일로 그 학교에 말해 그 학생을 찾아내서 혹시라도 학교 측에서 그 아이에게 벌을 주게 된다면 그 아이 미래에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성추행을 당한 것보다 선생님의 말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내가 겪은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버려서 말이다.
그러자 죽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했는데 결국 가족이 집에 아무도 없는 날을 기다려 죽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와서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떨어져 죽을 생각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
우리 집은 4층이어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떨어진 후, 내 시신이 집 앞에 있을 걸 생각하니 하필 그 때 우리 집 근처를 지나서 그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엄마한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내가 죽으면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그때 되면 그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인가, 누군가는 치워야 하는 일이다, 너무 죄송해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도 무서워서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있다가 이러면서 몇 분씩 미루고 있었다. 내가 진짜 죽을 수 있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이 고통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마음이 좀 더 빠르게 굳었으면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친구들이 1층에 있는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놀자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럴 기분이 아니어서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친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이 부족해서 그래. 너는 대신 오늘 내내 술래 안 시킬게.
친구들이 집 앞을 떠나지 않으면 뛰어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죽으면 놀아줄 수도 없는데 친구들 부탁이나 들어주고 죽어야지.
친구들은 첫 시작만 술래를 안 시키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잡히면 반드시 술래를 시켰다. 그리고 술래잡기도 잘 못해서 많이 잡혔다. 결국 내가 술래 제일 많이 했다. 도박과 공부에 이어 술래잡기마저도 잘 못 했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말하고 말았다.
-술래 안 시킨다며.
-그럴려고 했는데 같이 재미있게 놀자고 부른 건데 너만 그렇게 놀면 우리가 재미가 없을 거 같지 않아? 이런 건 정정당당히 하는 게 맞지 않나? 진짜 너는 너만 술래 빼줬으면 좋겠냐? 진짜 그게 맞는 거 같냐?
저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노는 것에 나만 따로 특혜를 바라는 인간이 되버린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다.
그래놓고, 한참을 놀다가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또 술래에서 제외시켜주었다. 그렇게 놀고 집으로 돌아오니 죽을 생각이 별로 없어졌다. 아니, 노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좀 더 살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사람 생각이 순식간에 바뀌는 건 아니어서 저 날 이후로도 종종 죽고 싶긴 했지만, 저 날만큼 강하게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놀면 좀 나아졌다. 좀 강하게 들면, 더 오래, 더 몰입해서 놀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언제부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힘을 잃고 그냥 저 때 진짜 죽고 싶었었지, 하는 기억만 있을 뿐, 저 일을 생각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불쾌한 기분이 떠오르긴 했어도 거기까지였다. 죽기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노는 게 이렇게 유익한 것이다. 이겨도 좋지만 져도 말이다.